[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7]
좌우를 막론한 우생학에 대한 지지
우생학의 창시자 골턴은 1907년에 열렬한 사회적 다윈주의자였던 수학자 칼 피어슨(Karl Pearson)과 함께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에 골턴국가우생학연구소(Galton Laboratory for National Eugenics)를 설립하여 우생학의 연구와 전파에 매진하였습니다. 이 연구소는 영국 우생학 운동의 지적 산실 역할을 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개인 기부금으로 운영되었으나 종전 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소로 발전하였지요. 인간의 유전을 통계학적 방법에 근거해 연구하는 생물통계학(biostatistics)을 발전시켰던 골턴과 피어슨은 현대 통계학의 기본 도구가 되는 상관계수(correlation coefficient)와 정규분포를 나타내는 그 유명한 종형 곡선(bell curve)을 개발한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생학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지지자들을 이끌어 냈으며, 특히 당시에는 신생 분야였던 유전학 자체가 우생학과의 뒤얽힘 속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유전학(genetics)이라는 용어는 1905년이 되어서야 윌리엄 베이트슨(William Bateso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는데, 다수의 유전학자들이 우생학적 관심에 의해 동기부여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유전학의 핵심적인 이론 및 기술 중 몇몇은 직접적으로 우생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요.
의사들도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데 있어 실패를 거듭하자 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전주의적인 우생학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저명한 의학 전문 저널인 『랜싯(The Lancet)』과 왕립내외과의사협회(Royal College of Surgeons and Physicians)는 우생학적 단종수술을 지지하는 성명을 채택하기도 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골턴국가우생학연구소와 더불어 최초의 우생학 운동 단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우생학교육협회(British Eugenics Education Society) 또한 창립되었고(1926년에 영국우생학회(British Eugenics Society)로 개칭됨), 이듬해 골턴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 협회의 회원은 그 수가 가장 많았을 때에도 700명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회원들과 지지자들 중에는 당대의 저명한 의사, 과학자, 사상가들을 비롯한 사회적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생학의 발상지이자 종주국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페이비언 사회주의의의 지도자였던 웨브 부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 다수가 좌우를 막론하고 이러한 우생학 사상을 수용하였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윈스턴 처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조지 버나드 쇼, 웨브 부부)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와 아서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같은 보수당의 정치가들도 이 협회의 회원이었는데, 그들은 둘 다 영국의 총리를 역임한 인물들이지요. 그리고 1912년 런던에서 열린 제1회 국제우생학회의(International Eugenic Congress)의 부의장에 이름을 올렸던 인물 중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도 있었습니다. 벨은 전화기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고 농인의 교육을 위해 힘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농인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농인들 간의 결혼이 금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우생학 지지자이기도 했습니다.
우생학의 지지자들이 우파 성향의 인물들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소설가 겸 문명비평가로 레닌 및 트로츠키와도 교류했던 열렬한 사회주의자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지도자인 시드니 웨브(Sidney Webb)와 비어트리스 웨브(Beatrice Potter Webb) 부부,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극작가이자 소설가이며 페이비언협회의 리더 중 한 명이었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산아제한운동의 선구자인 마리 스톱스(Marie Stopes)와 같은 여성 또한 우생학의 지지자였으며, 실제로 우생학은 맑스주의자, 페이비언주의자,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시드니 웨브는 “일관성 있는 어떠한 우생학자도 ‘자유방임주의’적인 개인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가 절망하여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즉 그는 개입하고, 개입하고, 또 개입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1) 이처럼 우생학 자체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하나의 과학으로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보어전쟁이 끝나고 난 후인 1903년에 영국에서는 체위저하에관한부처합동위원회(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Physical Deterioration)가 구성되었고, 도시 빈민들과 학교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실태조사가 진행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1908년에는 왕립정신박약자돌봄및통제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Care and Control of the Feebleminded)의 보고서가 출간되었고, 이 보고서의 내용은 다시 1913년 「정신적결함법(Mental Deficiency Act)」의 제정으로 이어졌지요.
「정신적결함법」의 제정에는 인간 지능의 유전에 대한 골턴의 연구, 당시 막 도입되기 시작한 IQ 검사, 영국우생학교육협회의 캠페인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이 법의 주요 내용은 일반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능력이 없고 다른 아동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신적 장애아동들을 정신적결함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격리기숙학교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1929년에 전국교사노조 집행부가 “지금이야말로 정신적 결함자들 사이에서의 재생산이라는 총체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때이다.”라는 진술을 담은 결의안을 승인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2) 이러한 조치는 별다른 반대 없이 실행되었고 영국에서 장애인들의 시설 수용을 크게 촉진시켰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자발적 단종 수술의 합법화를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1934년에 정부가 내놓은 「단종수술에 대한 담당부처 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Departmental Committee on Sterilization)」(일명 브록 보고서(Brock Report))의 내용에 따라 1937에 「자발적 단종법안(Voluntary Sterilization Bill)」이 의회에 제출됩니다. 이러한 단종수술의 합법화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동의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모닝 포스트(Morning Post)』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전체 응답자의 78.7%가 단종수술에 찬성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는 단종수술의 합법화가 오히려 중산계급의 출산율을 더 감소시키고, 임신에 대한 걱정 없이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성행위로 인해 성병의 확산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노동당, 노동조합, 가톨릭 교회 등은 우생학적 단종수술에 반대를 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적 분위기로 인해 의회의 최종 표결에서 「자발적 단종법안」은 부결되었고 결국 법제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요.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영국은 자본주의의 종주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생학의 발상지이자 종주국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우생학 사상은 당시의 중산계급과 사회지도층 전반에 좌우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습니다. 비록 단종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네거티브 우생학의 실천은 상대적으로 미약했지만, 의사․생물학자․유전학자․심리학자 등의 참여 아래 영국에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된 우생학은 이후 미국에서 강력한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점차 전 세계로 확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각주 1) Diane B. Paul, The Politics of Heredity: Essays on eugenics, biomedicine and the nature-nurture debate, New York: SUNY, 1998, p. 14.
각주 2) Roy A. Lowe, “Eugenicists, doctors, and the quest for national efficiency: an educational crusade, 1900~1939”, History of Education 8(4), 1979, p. 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