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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5]

새로운 주제에 대한 소개





끝없이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이들 가운데 일부는 노동 가능자로, 나머지는(!?) 노약자로 분류될 것이다. 노동 가능자는 머리가 깎이고 팔에 등록 번호가 새겨진 뒤 강제 노역에 동원될 운명이며, 그들 중 다수는 온갖 학대와 탈진으로 숨지거나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될 것이다. 노약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그 유명한(?) 가스실로 보내져 결국 학살된다. 그리 먼 과거가 아닌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1940년에서 1945년 사이 불과 5년의 기간에만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갔고, 이들 가운데 150만 명가량이 독가스, 총살, 기아 등으로 숨졌다. 이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에 따라 독일에서 학살된 유대인의 수는 5백만 명을 훨씬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집계되지 않았지만 질병환자, 정신병자, 장애인, 경제적 빈곤자 등과 같이 독일 인종 내에서도 비정상인(!?)으로 판정되어 가스실로 보내진 사람들의 숫자가 또한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위의 내용은 우생학을 다룬 한 외국 연구서의 옮긴이 서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1)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eugenics)’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독일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무자비하고 끔찍한 학살, 그리고 이를 뒷받침했던 우생학. 그리하여 우리는 우생학을 나치즘에 경도된 일부 학자들이 고안해 낸 ‘사이비’ 과학이라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우생학적 폭력을 현재의 우리 삶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중 하나. 수용자들은 이곳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갔으며, 노동력이 없는 어린아이, 노약자, 장애인은 가스실로 보내졌다.

▲오늘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중 하나. 수용자들은 이곳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갔으며, 노동력이 없는 어린아이, 노약자, 장애인은 가스실로 보내졌다.



물론 그러한 비난은 일면 정당하며,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 역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과 거리 두기의 이면에는 과학이란 객관적이고 좋은 것이며 정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어떤 통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로 인해 현재 유전학과 생명과학이라는 ‘진정한’ 과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개입들에 내포된 바로 그 정치적이고 우생주의적인 성격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리 예고해드렸던 대로 ‘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는 이번 주부터 「우생주의의 역사와 생명권력 시대의 장애」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재를 이어 갑니다. 이번 연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일부 변경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구성과 순서를 따를 것입니다.



○ 20세기 전반기 우생학의 역사
 - 우생학의 등장: 영국
 - 우생학의 대중화: 미국
 - 우생학의 극한적 실천: 독일
 - 복지국가의 우생학: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 우생학이라는 타이틀의 소멸과 내용의 보존
 - 개혁 우생학와 인류유전학
 -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 현대의 네거티브 우생학

 

○ 생명권력 개념을 통해 본 우생학과 현대의 우생주의적 실천
 - 살게 만드는 권력이 어째서 사람을 죽게 만드는가
 - 예외상태에 놓인 생명, 장애인
 - 신자유주의적 통치성과 우생주의
 - 저항의 두 가지 차원: 주체화와 저항권 




우선 첫 번째 부분에서는 영국의 장애학자인 톰 셰익스피어(Tom Shakespeare)가 앤 커(Anne Kerr)와 함께 저술한 『유전자 정치: 우생학에서 인간게놈프로젝트까지(Genetic Politics: From Eugenics to Genome)』(2002)2)를 기본 텍스트로 해서 20세기 전반기의 우생학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생학은 영국에서 그 기본적인 내용이 확립된 후 미국에서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이 됩니다. 나치하의 독일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극적인 실천이 이루어졌지만, 스칸디나비아의 복지국가들 또한 우생학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요. 우생학적 폭력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는 단종법(sterilization law)은 1907년 미국의 인디애나주에서 처음 실시된 이래 1920년대 말에는 캐나다, 스위스, 덴마크, 1930년대에는 독일,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일랜드, 1940년대에는 일본에서 제정되어 길게는 1970년대 중반까지 유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우생학이 결코 독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당시에는 매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최첨단의 ‘과학’이자 현대 유전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음을 확인할 것입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우생학이라는 타이틀이 소멸되는 과정에서도 그 기본적인 관점과 내용이 어떻게 현대의 인류유전학(human genetics)과 의료유전학(medical genetics) 내로 이전되었는지를 고찰한 후,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유전학적 중재의 사례로서 산전 검사(prenatal testing) 및 선별적 낙태(selective abortion)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부분에서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생명권력(biopower) 개념을 통해 20세기 전반기의 우생학과 현대 유전학의 우생주의적 실천을 성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코의 생명권력에 대한 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우생학적 폭력이 어떤 특수한 반인륜적 정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근대적 국가권력의 속성 그 자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는 것임을 이해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이 창출해내는 예외상태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는 장애를 지닌 태아에 대한 산전 검사와 선별적 낙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통치성(neoliberal governmentality) 아래 ‘자기-경영적 주체’가 재생산되고 있으며 현대 사회가 점점 더 규율사회를 넘어선 배제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때,3) 과연 개인의 선택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현대사회의 유전학적 중재가 진정 자유로운 선택일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활발한 의견 개진 기대하겠습니다.

 

 


각주 1) 앙드레 피쇼, 『우생학: 유전학의 숨겨진 역사』, 이정희 옮김, 아침이슬, 2009, 5~6쪽.
각주 2) 이 책은 아직 국역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향후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의 일부로 번역 출간된 예정이다.
각주 3)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김상운 옮김, 후마니타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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