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4]
실천지향적 해방적 학문으로서의 장애학
키워드 3 : 실천지향적
장애학이 실천지향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사실 크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는 장애학과 장애인운동의 관계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애학은 기본적으로 학문공동체 내부의 아카데믹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 학문이 아닙니다. 여성학이 차별받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이 사회가 어떤 식으로 여성을 억압해왔는지를 담론화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처럼, 장애학 역시 차별받는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장애인운동의 이론적 무기를 벼리고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1960년대 말부터 대중적 장애인운동이 활성화된 이후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장애학이 하나의 실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러한 장애인운동과 장애학의 직접적인 관계를 잘 드러내 줍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사회적 장애모델의 성립을 주도했던 빅터 핀켈스타인(Victor Finkelstein),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 콜린 반스(Colin Barnes) 등의 학자들은 모두 장애인이면서 장애인운동의 선봉에 있던 활동가들이기도 했습니다.
장애학의 궁극적 지향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장애인차별철폐, 장애해방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즉 장애인운동의 지향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장애학 (함께) 하기’를 이야기하면서 참조했던 고병권의 말을 차용하자면 ‘장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인 것이지요. 따라서 장애학에 만약 실천지향적 성격이 부재하다면, 그것은 엔진 없는 자동차이고 앙꼬 없는 찐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장애학은 장애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장애학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키워드 4 : 해방적
장애학도 당연히 하나의 학문이고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연구 방법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애학 연구의 방법 내지 연구의 기본적 태도로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해방적 연구 접근법(emancipatory research approach)입니다. 그런데 연구면 그냥 연구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수행해야 해방적으로 연구를 한다는 것일까요? 얼른 잘 감이 오지를 않지요? 사실 해방적 연구 접근법에서 이야기되는 내용은 매우 다양하기도 하고 또 논쟁적인 지점들도 존재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핵심적인 지점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우선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하나의 ‘과학(science)’이 연구를 수행할 때 지켜져야 할 기본 원칙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객관성’이고, 조금 달리 정치적인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중립성’이지요. 어떤 연구가 객관성과 중립성을 상실했다고 하면, 그건 연구로서의 가치도 없다고 비난을 받게 되곤 하지요.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는 누군가의 편을 들거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즉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고 보통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장애학이 이야기하는 해방적 연구 접근법에서는 이러한 연구자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편파성’과 ‘당파성’을 대놓고 주장을 합니다. 즉 해방적 장애 연구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입장에 서 있고 누구의 편을 든다는 것일까요? 바로 억압받는 자와 장애인의 편에서 이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고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해서 하나의 일화를 좀 소개할까 하는데요, 영국의 장애인운동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1세대 인물 중에 폴 헌트(Paul Hunt)라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탈시설(deinstitutionalization)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데요, 원래 헌트는 레너드 체셔 재단(Leonard Cheshire Foundation)1)이 운영하는 잉글랜드 남부의 한 시설에서 생활하던 시설생활인이었습니다. 레너드 체셔 재단은 우리나라로 치면 꽃동네 정도 되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사회복지재단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냥 착한 장애인은 아니고 성깔이 좀 있는 까칠한 장애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시설 내에서 다양한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또 열악한 생활환경도 영 마음에 들지 않자, 동료 생활인들을 조직해서는 시설 경영진에 맞서 소요를 일으키고 일련의 논쟁과 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의 성과로 영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회복지 연구소 중 하나인 태비스톡 연구소(Tavistock Institute)를 초청해서 실태조사를 진행하기로 합니다. 헌트의 입장에서는 전문적인 연구자들이 와서 조사를 하게 되면 시설 체제의 문제점이 낱낱이 드러나리라 기대를 했겠지요.
그렇게 시설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고 당시 책임연구원 격으로 조사에 참여했던 에릭 밀러(Eric Miller)와 제럴딘 그윈(Geraldine Gwynne)은 얼마 후 연구보고서를 내놓게 되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헌트는 시쳇말로 완전히 ‘꼭지가 돌고’ 맙니다. 보고서의 내용 중 기대했던 시설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은 하나도 없고, 그저 조금 완고한 시설 경영진과 불만 많은 생활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진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서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시설 내에서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낀 헌트는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는 요지의 글을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Guardian)』에 기고한 후 시설을 나왔고, 결국 영국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모태가 된다고 할 수 있는 분리에저항하는신체장애인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UPIAS)의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후 헌트는 1981년에 그 연구보고서의 내용과 연구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생적 인간들과의 거래를 청산하기(“Settling accounts with parasite people”)」라는 글을 한 편 쓰게 되는데요, 여기서 재밌고도 중요한 것은 헌트가 그 연구자들이 시설 체제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연구자들은 스스로를 시설 경영진과 생활인들 사이에서 객관적이고 불편부당한 입장을 취했다고 자부했겠지만 말입니다.
▲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결국 이 일화가 드러내주는 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누구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객관성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우리 사회에서 보통 객관적․중립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와 억압하는 자들의 객관성․중립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편파성․당파성이 객관성․중립성으로 포장이 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로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Howard Zinn)이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고 이야기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 함의를 새길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러한 권력자와 억압자의 입장을 자꾸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이라고 우긴다면, 장애학은 편파적이고 당파적임을 당당히 선언하고 연구를 수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방적 연구 접근법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둘째, 학문을 한다는 것도 하나의 활동인데요, 모든 활동에는 그것을 실행하는 주체(subject)가 있습니다. 학문이라는 활동에서의 주체, 즉 학문을 하는 사람이 누구이지요? 일반적으로 학자(學者)라고 부를 수 있겠고, 흔히들 전문가라고 이야기하지요. 한쪽에 주체가 있으면 그 맞은편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렇지요, 객체 내지 대상(object)이 있겠지요. 그래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의 장애 관련 연구에서는 학자나 전문가들이 ‘주체’가 되고 장애인은 ‘대상’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까지 의학․재활학․심리학․사회복지학․특수교육학 등의 장애 연구에서는 장애인이 대상화(objectification)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듯이 ‘대상화된다’라는 말을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지는 않지요. 그들의 주체성과 목소리를 앗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장애 연구에서는 연구자 내지 전문가와 장애인 사이에 주체/대상이라는 위계 및 권력 관계가 분명히 존재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학도 하나의 학문이고 장애학을 하는 학자들이 존재하는데, 그러한 장애학자들과 장애인 대중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것이 바로 해방적 연구 접근법의 두 번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앞서 장애학 하기란 곧 장애학 ‘함께’ 하기라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는데요, 여기에 일정한 힌트가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대중 예능프로그램의 한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참가자들이 함께 하나의 팀을 이루어 공동으로 선곡을 하고 편곡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장애학이 수행하는 장애 연구에서는 연구자들과 장애인들 사이의 관계가 콜라보레이터(collaborator), 즉 공동작업자 내지 공동연구자(co-researcher)로서 설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장애학의 장애 연구에 있어 장애학자와 장애인 대중의 관계는 장애인차별철폐와 장애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함께 소통하고 논의하고 연구하고 실천을 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용어를 빌리자면 장애학자는 장애인 대중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장애학에서의 장애 연구는 그 연구의 결과물이 장애해방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만큼이나 그 연구의 과정 역시 장애인 대중에게 억압적이지 않고 해방적인 것으로 존재를 해야만 한다고, 그것을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각주 1) 이 재단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현지재단을 두고 장기요양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양한 보건․복지․교육․자원봉사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영국의 공군 장교인 레너드 체셔에 의해 1948년 설립된 체셔 요양홈 재단(The Cheshire Foundation Homes for the Sick)을 모태로 하며, 1976년 이래로 오랫동안 레너드 체셔 재단이란 이름으로 운영되었고, 2007년부터는 명칭을 레너드 체셔 디스어빌리티(Leonard Cheshire Disability)로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