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우리 안의 수용소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입력 : 2017.06.04 21:17:01 수정 : 2017.06.04 21:22:38
1979년 여름, 아버지는 서울 당숙집 가는 길에 나를 데려갔다. 도회지라고는 장날 읍내 몇 번 가본 게 전부였던 내게 서울여행은 지금의 외국여행 못지않았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온종일 달려 도착한 서울. 이튿날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왔다. 근처 당고모집에 내 또래의 친척 형제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그런데도 어떻게 혼자서 집을 나서려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랫마을 살던 친구집을 찾을 때처럼 쉽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참을 걸었다. 언제부턴가는 어디를 간다는 생각도 잊은 채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배고픔을 느끼고는 집을 향해 걸었다. 신통하게도 길을 잃지는 않았다. 물론 난리가 났다. 모두가 사방으로 나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지금도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와 ‘잘됐다, 잘됐다’만 연발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에 안 일이지만 내가 헤매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립아동보호소가 있었다.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지난주 나는 아동보호소를 거쳐 소년수용소로 보내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1960~70년대 서울의 어느 길에 있던 아이들이었다. 집을 뛰쳐나와 떠돌던 아이도 있었고, 친척집을 찾아가던 아이도 있었으며, 다른 아이들과 골목길에서 놀다가 단속 실적을 채우기 위해 일단은 경찰서에 넘기고 보는 공무원에게 잡힌 아이도 있었다. 공통점을 하나 더 찾자면 공무원이나 경찰에게 잡힌 뒤 겁에 질려 정확한 주소를 빨리 대지 못했다는 것. 한마디로 1979년 여름의 나 같은 아이들이었다.
어디에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주소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행여 그것을 알아도 경찰 앞에서 하얗게 질려 즉답을 못한 아이들. 나중에 뭔가를 기억해 낸 건 소용이 없었다. 부모의 이름을 기억하고 학교 이름을 기억해도 ‘부랑아’라는 새 이름을 얻은 뒤부터는 아무도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부랑아는 거짓말을 일삼는 예비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비검속된 것이다.
아이들이 끌려간 곳은 선감도라는 경기도 안산 인근의 작은 섬이었다. 거기에 선감학원이라는 수용시설이 있었다. 선감학원은 일제 말기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8세에서 18세의 아이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다. 학원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행태상으로는 틀림없는 강제수용소였다. 아이들은 머리를 밀고 수용자복을 입은 뒤 군대식 규율에 따라 생활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이들이 여기서 노역과 폭행,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었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바닷물에 휩쓸려 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수용소는 1982년까지 운영되었다. 정부는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를 거치는 동안에도 부랑아를 줄곧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수십 년간 수천 명의 아이들을 여기에 수용했다. 정부의 인식은 일제 식민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길에서 배회하는 빈민은 어른이든 아이든 예비범죄자라는 것. 따라서 이들을 잡아들여 영혼을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1980년의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까지 이런 인식이 이어졌다. 선감학원은 어린이 판본의 삼청교육대였던 셈이다(실제로 선감학원을 탈출했다가 나중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아이도 있었다).
이미 쉰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내가 지난주에 본 당시의 아이들은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1970년대 말 서울의 거리를 나처럼 헤매다가 선감학원에 끌려왔던 중년 남자는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피해자들 중에는 국가에 의해 언제든 강제납치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증언을 거부하거나 구술자료 반환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의 강제노역과 구타, 암매장,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주민들에게 재납치된 이야기까지. 나와 시간과 장소를 아슬아슬하게 비켜나 있었을 뿐인 아이들의 증언은 내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만들었다. 가난했던 어린 우리들이 헤매며 걸었던 길들이 우리를 매장할 수도 있는 얇은 얼음이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란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평소 잠복성 질병처럼 영혼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가 일이 터지면 삼단논법의 대전제처럼 기능하는 인식이 있다. 대부분 근거 없는 선입견인지라 보통 때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터지면 해당 인식이 자극을 받는다. 우리의 이후 생각과 행동은 모두 거기서 도출된다. 이를테면 영혼 밑바닥에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건에 임하여 이방인들을 가둘 죽음의 수용소를 추론해낸다. 사건의 충격파가 그 인식의 나뭇가지를 잠시 흔들기만 하면 된다.
선감학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혼의 밑바닥에 빈곤과 범죄, 길거리를 잇는 짧은 문장 하나가 심어져 있다면, 우리는 길거리를 배회하는 여덟 살의 아이마저 범죄 예방을 목적으로 잡아들일 수 있다. 수용소가 이미 폐쇄되었는지, 아직 건립되지 않았는지는 부차적이다. 영혼 밑바닥의 인식의 나무가 건재하는 한 수용소는 시공 허가만을 기다리는 건물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문을 열었는지도 몰랐던 선감학원은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죽음의 수용소를 낳은 문장들은 우리 인식에서 전혀 시들지 않았고, 게다가 요즘에는 또 다른 소수자들을 거명하는 온갖 위험한 문장들이 봄날의 홀씨처럼 우리 영혼의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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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042117015&code=990100#csidx21cdecf7bbafda7829309ea7afce1c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