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첫 수업을 하던 날,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고요였다. 내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수업 종이 쳤는데도 떠들어대던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 그런데 첫 수업에서 나는 소란이 아니라 고요를 이겨내야 했다.
좁은 교실에 열 명 안팎의 학생이 있을 뿐인데도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전화기에 더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처럼 나는 목청을 한껏 높였다. 그러나 내가 그날 들은 소리라고는 전동휠체어를 움직일 때 나는 전자음을 빼고 나면 대부분이 내가 낸 소리였다. 나는 내 말만 들었던 것이다.
그날 학생들 중 음성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서넛 정도였다. 그것도 힘겹게 한 단어씩, 아니 한 글자씩 발성하기 때문에 한 문장을 말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떤 학생은 소리가 너무 작아 귀를 바싹대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었고, 겨우 한 마디 소리를 내던 어떤 학생은 고개를 갸웃하는 나를 보고 결국 가방 속에서 글자판을 꺼내야 했다. 손발을 전혀 쓸 수가 없고 내가 듣기에는 그저 길이와 강약으로만 구분되는 ‘에~’하는 소리만 내는 학생도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큰 소리를 낼 수 있지만, 그다지 와 닿지도 않는 내 말에 답하느라 온몸을 비틀어대는 수고를 원치 않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학생들은 데시벨은 낮지만 상당히 수다스럽다는 것을. 기쁨이든 슬픔이든 참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소리를 내지르고 온몸을 휘저으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한다. 내 이야기가 와 닿을 때나 내가 잘 듣는 것 같을 때, 학생들은 더 많은 소리를 내며 더 큰 표정을 지었다. 한 학생은 학기 내내 단 1데시벨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입가의 미소로 동의했고 눈밑 그늘로 물음을 던졌다. 내가 정 알아듣지 못하면 책상에 한두 글자를 적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수업은 학기 후반으로 갈수록 활기를 띠었고 데시벨을 올리지 않은 채로도 꽤나 소란스러워졌다. 소리 없는 소리들이 계속 더해졌기 때문이다.
겨우내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커다란 함성이 울린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그 함성소리가 가장 컸던 12월3일은 세계장애인의 날이었다. 마침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며칠 전 일어난 끔찍한 두 사건을 언급했다. “11월20일, 전주에서 아버지가 장애인 아들을 목 졸라 죽였습니다. 11월23일 또다시 경기도 여주에서 어머니가 장애인 아들을 목 졸라 죽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국가의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 했다. 부양을 가족에게 떠맡기는 나라에서 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될 때 자식을 살해하고 곧이어 자식을 죽인 자신을 살해한다. 국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살인은 부모가 저지른다. 그런데 부모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국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은 국가의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숱하게 당해왔다. 활동보조인을 곁에 두지 못한 중증장애인은 불이 난 방에서 5m 앞 현관문을 열지 못해 타죽고, 보일러가 동파되었을 때 전화 한 통을 걸지 못해 얼어 죽는다. 수십 년을 헌신한 부모가 갑자기 절망한 눈빛의 살인자로 돌변할 때도 있다. 국가는 제 일을 하지 않을 때 살인을 한다. 장애인들은 ‘세월호 7시간’의 공포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절절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힘껏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또 세월호의 진실이 규명되기를 바란다. 물론 데시벨이 높지 않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지상의 함성과 대비되는 지하의 고요. 광화문 지하에는 ‘장애인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1500일을 넘긴 농성장이 있다. 그리고 농성장 앞쪽 통로를 따라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의 사진이 있다. 사진은 원래 말이 없지만 영정 사진이라 더욱 말이 없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질러댄 소리만 듣고 돌아왔던 첫 수업 날을 떠올렸다.
지금 많은 시민들이 대통령에게 똑똑히 들으라고 더 가까이서 더 크게 외치고 있다.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발화자와 청취자가 너무 단순화된 건 아닌지 걱정이다. ‘박근혜는 즉각 퇴진하라’는 큰 함성은 여러 사연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세월호의 절규도 있을 것이고, 강남역의 비명도 있을 것이며, 구의역의 흐느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15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광화문 지하의 소리 없는 고함도 있을 것이다. 함성이란 큰 소리이면서 동시에 여럿이 내는 소리이다. 거기에는 모든 집합에 포함되는 공집합처럼 묵음 즉 ‘소리 없는 소리’까지 참여하고 있다. 이 소리들이 비단 대통령에게만 향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오늘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내 소리만 듣고 왔다면, 즉 광화문 지상의 데시벨을 올렸을 뿐 광화문 지하의 소리는 듣지 않았다면, 우리의 청취력은 우리말을 도무지 듣지 않는 청와대의 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내가 쓰는 칼럼의 제목을 ‘묵묵(默墨)’이라 한 것은 소리 없는 ‘묵’을 검정 ‘먹’으로 적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이란 본래 소리가 나지 않지만, 정작 소리 나지 않는 것을 글로 쓰는 건 정말 어렵다. 묵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들은 작은 소리가 있거든 한 자라도 적어보려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다. 실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제목을 단 셈이다. 어떻든 이렇게 독자들께 첫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