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노동
백납
1. 활동보조인의 업무, 장애인 이용자와의 관계,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많이 드는 질문은 활동보조인이 활동보조 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제공할 것으로 요구되는 급부를 한계 짓는 문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인 인권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로부터 제기되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장애인의 자립생활에 있어서 ‘관계자본’을 어떻게 구축할지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였고, ①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혹은 ②‘관계자본’자체로서 활동보조인을 간주했다. 풀어보자면 ①전자의 경우 장애인이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사회와 만나기 위한 외출이 필요하고, 그 외출을 위해서는 활동보조인의 노동이 필요하며, 만난 사람에게 활동보조의 부담을 주어 기피되는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활동보조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에서 나온 결론이었고, ②후자의 경우 장애인이 살아가는 중에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족처럼 달려 와 줄 활동보조인이 필요하다는 요청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그래서 실재로 활동보조인을 구할 때 장애인 이용자의 인근지역에 사는 사람이 선호되기도 한다.1)
관계의 문제와 활동보조인 노동의 한계 문제는 얼핏 다른 문제처럼 보일 여지도 있지만, 장애인 이용자와 돈독한 관계를 맺은 활동보조인에게는 돈독한 관계에 따르는 노동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대는 ③‘알아서 해주는 활동보조인’으로 까지 나아가기도 한다.2) 우리는 <자기결정하는 자립>을 읽은 시간에, 자기결정만이 강조될 경우, 자기결정이 불가능한 장애인들―예를 들자면 정신장애인―이 자립에서 소외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결정하는 자립>에서 강조된 것은 자기결정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책에서는 자기결정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보조를 잘 확보해 그 사람이 불이익을 받지 않을 방법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자기결정능력의 절대성을 회의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결정하지 않는 즐거움을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활동보조인의 노동으로 요구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행해야 할지 고민되는 것은 사실이다.
2. 알아서 해주는 활동보조인
‘활동보조인연대’ 활동을 통해서 여러 활동보조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활동보조인들 대부분은 ‘운동’보다 ‘생계’에 가까웠다. 그들이 생각하는 활동보조인과 장애인 이용자의 관계는 장애인 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센터 소속 활동보조인 n씨는, ‘알아서 해주는 활동보조인’이기를 거부한 사례다. 그는 자립생활센터 직원의 사무보조를 겸하는 활동보조인이었다. 그와 장애인 이용자 간에 센터 홈페이지에 기사를 스크랩해 업로드 하는 업무를 두고 갈등이 생겼다. n씨의 장애인이용자는 n씨가 기사 스크랩을 알아서 업로드 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n씨의 입장은 달랐다. 자신은 기사를 올리는 것에 대한 신체적 일을 해 줄 뿐, 기사를 선별하는 것은 장애인 이용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애인 이용자가 쉬는 경우도 있는데 자신이 알아서 기사를 업로드 한다면 그것은 활동보조가 아니라 장애인 이용자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그의 이용자는 정신장애는 없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3. 관계자본으로서의 활동보조인
장애인 이용자가 활동보조인을 긴급하게 부른다 할지라도 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장애인 이용자의 긴급한 호출에 응할 의지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약속된 시간 외에 장애인 이용자가 전화 하면 전화를 받지 않는 활동보조인도 있었다. 전화를 할 내용이 뻔하며, 이용자의 요청을 들어 줄 수 없다면, 그것을 고사하느라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장애인 이용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용불안정에 대한 지적이 나왔다. 아무리 잘해줘도 어차피 이용자 마음에 안 들면 활동보조 제공을 거부당하는 것은 쉬웠다. 별다른 애착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했다. 장애인의 삶에 어떤 조언을 해주는 것은 장애인 이용자의 자기결정권침해를 이유로 해고당할 수도 있었다. 장애인 이용자의 삶에 개입하기에는 그들의 삶이 위태로웠다.
4. 관계를 맺는 수단으로서의 활동보조인
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을 이용하더라도 사회와 관계 맺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폐쇄된 곳에서의 삶을 경험한 장애인들이 관계 맺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이기도 하지만, 활동보조인이라는 존재가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활동보조를 제공했던 장애인 이용자는 수동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장애인이었다. 그도 전동휠체어를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에 하루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외출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는 전동휠체어 운전이 힘들었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간판 등에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장애인과 함께 있는 비장애인은 보호자나 장애인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보여진다는 것이었다. 이용자의 실수에 내가 사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요청되는 윤리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장애인 이용자의 소중한 경험으로서의 실패3)를 막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낯선 사람에게 행한 자신의 실수를 사과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이용자의 언어장애를 통역해 줄 때도, 내가 그의 관계형성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용자의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비장애인들에게 이용자의 언어를 전달해 줄 수는 있었으나, 그들 사이에서 관계가 만들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활동보조인이 있으면 된다는 어떤 심리는 관계를 맺는 것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듯도 했다.
5. 관계가 되어 줄 수도, 관계를 맺어 줄 수도 없다
활동보조인 제도는 동정과 시혜의 방식이 아닌 장애인의 권리로서 요구되었고, 그것을 현실화 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지급하는 바우처를 매개로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관계의 본질은 계약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활동보조인의 특수성이라는 명목으로 특별한 관계일 것이 요구되거나 특별한 노동이 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접근방식이 아닌가 한다. 활동보조인의 고용 불안정은 장애인 이용자와 활동보조인의 관계를 임시적으로 만들며, 그들 사이에 공동체적 윤리가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지속적 관계 이후에 윤리에 대한 고민이 가능하다. 지속적이지도 않은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이익으로 엮어진 관계에서, 그것을 넘어선 윤리를 요구하는 것은 과한 요구로 보인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야한 장애인이고 싶다>를 다시 읽어본다. 저자의 야함과 핫함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가 타인과 관계 맺는 이야기 속에 활동보조인의 자리는 없다. 어쩌면 누군가의 부재가 조건인 듯도 보인다. 상처받은 맨살을 보여주는 것, 상처받을 맨살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관계 맺기의 시작은 아닐까. 그 맨살을 오히려 활동보조인이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최근에 발족한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 위원장 배정학씨는 인터뷰 중에 “장애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 주민”으로 활동보조인의 가치를 설명하는데 이는 활동보조인을 장애인의 관계자본으로 여기는 여러 시선들과 맥을 같이한다. _ 비마이너, “활동보조인의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달라.”, 2013.03.07. <http://beminor.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3&no=4990>
2) 결정하지 않는 즐거움의 맥락에서 활동보조인의 역할을 규정한 의견 : “그렇다고 해서 활동보조는 장애인의 손발이라는 주장이 장애인이 모든 일을 일일이 지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대신 알아서 해 주는 것이 좋은 때도 있다. 일일이 모든 일을 시켜야 하는 것은 또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_ 비마이너, “일본의 장애인 활동보조 제도화 현장”, 2013.01.07. <http://beminor.com/news/view.html?section=86&category=105&no=4748>
3) 자립생활운동에서는 장애인도 실패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비장애인들도 실패를 통해 성장하고 학습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애초부터 그럴 기회가 박탈 당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