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 변호사·장애학연구자)
박경석이라는 계보
“물러서지 맙시다. 여기서 물러서면 또 수십년씩 집구석에 처박혀 살아야 합니다.”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교장 박경석이 한 시위현장에서 외쳤다.
열다섯 살까지 나는 ‘집구석에서만’ 살았다. 강원 영동지방에서 서울로 병원을 오갔다. 건강보험제도는 내 질병의 치료 방법에 적용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은 장애를 이유로 거부됐다. 사회적, 지리적 변방에 살던 나에게 1987년 이후의 시대가 갖는 의미는 크지 않았다.
2003년 서울로 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비로소 한국 사회의 주요한 정서와 경험에 접속되었다고 느꼈다. 고립된 섬에 살다 인터넷을 처음 개통한 느낌이었다. 80년대 운동권 문화와 90년대 드라마 <카이스트>의 정서가 아직 혼재하던 장소에서 약간 가슴이 뛰었다. 오래된 잡기장에 쓰인 논쟁들, 언어를 구축해가던 페미니즘, 새내기 배움터, 박종철 열사의 동상. 그곳에는 현대 한국 사회를 구축한 생각과 언어의 계보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접속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곳에 축적된 역사에서 장애인의 존재를 찾지 못해서다. 선배들은 걸어 다녔고, 체력이 좋았고, 백골단에 맞서 싸웠다고 한다. 반면 나는 캠퍼스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계단을 기어올라야 할 처지였다. 대학문화의 자유로움이나 민주주의 위대함은 계단 위에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 선로 위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며 전동차를 멈추는 장애인들을 발견했다. 겁쟁이인 나는 선로 위에 함께 누울 수 없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금세 대학으로 전해졌다. 장애인교육권이 학생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학교를 상대로 협상하고, 싸웠다. 몇년 사이 학교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휠체어가 탑승 가능한 셔틀버스가 도입되었다.
박경석은 1960년생으로, 20대 중반이던 1983년 행글라이더를 타다 추락해 장애인이 되었다. 그가 5년간 방에서 누워만 있다 밖으로 나왔을 때, 87년 6월항쟁, 88년 장애인올림픽을 거치며 청년 장애인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97년 그는 노들야학의 교장이 된다. 국어와 산수를 배우던 노들야학의 학생들은 2000년대에 이르면 휠체어로 버스를 세우고, 지하철 전동차를 멈추는 최전선에 서게 되는데, 박경석과 함께였다.
나는 그가 장애인이 될 무렵 태어났고, 노들야학 교장이 될 때 생의 첫 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위해 싸우는 동안 대학에 갔고, 그를 비롯한 장애인들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탄생시켰을 때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다.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나는 이제 일하고, 여행하고, 사랑하고, <한겨레>에 글을 쓴다. 박경석이 집구석에서 나와 점점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세상과 싸워온 시간은 이처럼 내 자유가 증대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우연일까?
최근 검찰은 장애인 이동권 등을 주장하는 시위에서 일반교통방해, 집시법 위반 등이 있었다며 박경석에게 징역 2년6개월을 구형했다. 목적이 정당하다면 언제나 실정법의 규율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분명한 점은, 그가 실정법을 어겼던 바로 그 순간을 경유하지 않고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장애인들이 정치적, 물리적으로 한국 사회에 등장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재판부가 선고할 형벌의 무게는 그래서 박경석에게만 가해지지 않는다. 그는 법관들은 아마도 접속하지 못했을, 그러나 뚜렷하고 분명하게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를 상징한다.
법원은 오는 2월8일 그에 대한 형을 선고한다.
법원이 수많은 장애인들의 삶을 가두는 결정만은 하지 않기를,
집구석에서 나온 많은 이들이 바라고 있다.
[야! 한국 사회] 박경석이라는 계보 / 김원영, 한겨레 신문, 2018년 1월 29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9915.html#csidx888061cb1d69716b615d043c24400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