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나의 깃발 / 홍은전
등록 :2016-04-25 19:05
야학 학생 김아무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의 장례가 끝난 직후였다. 갑작스런 부음도 믿기 어려웠지만, 그가 이미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3일 전 그는 소주 세 병을 마신 후 축 늘어진 채 잠이 들었고 그날 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의 죽음을 발견한 활동보조인은 충격에 빠져 어찌할 줄 몰랐다 했고, 가족들은 그가 ‘혼자’의 몸이었으므로 빈소를 차리지 않으려다가 기초생활수급자 장례지원단의 설득으로 삼일장을 치렀다고 했다. 그리고 하필 그날 그의 핸드폰이 켜지지 않았다고 했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우연들이 겹쳐 그는 15년을 함께 보낸 벗들과 단 3일의 이별의식조차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2001년 그를 처음 만났다. 뇌병변 장애인인 그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술에 취해 자신을 때리던 형제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 열아홉에 복지관에 나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속도가 더딘 그는 거기서도 배제되었다. 장애인의 날, 직원들이 장애인들의 머릿수를 센 후 차에 태워 올림픽공원에 풀어놓는 걸 보고 ‘천사 짓’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서른이 되어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가 원했던 건 ‘사람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는 법을 찾는 것’이었다. 술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한글은 좀처럼 늘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배움을 갈구했다. 몇 년 전 독립했고 술을 많이 먹었고 자주 넘어졌다. 상처를 달고 살았다.
만날 때마다 낄낄대며 타박했던 그가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그의 죽음이 적나라하게 깨우쳐주던 밤. 후회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술을 끊었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먹었다고 했다. 빈속에 부어댄 술의 숙취보다 끔찍한 것은 자꾸만 실패하는 못난 자신을 견디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학에 왔던 날, 그는 몸이 아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그 아픈 몸에 3일 동안 술을 부었다. 작은 방 한켠에 축 늘어진 채 잠들어 있는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슬펐다. 그들의 삶을 모르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열심히 도망치듯 살아오지 않았나. 그러나 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알았더라면 그 삶에 그토록 함부로 훈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마련된 추모제에서 영상 속 그를 보았다. 그는 니체를 읽었고, 연극을 했다. 텃밭에 가서 열무를 뽑았고, 초등학교에 가서 인권 교육을 했다. 그것들은 모두 학생들의 깊은 무기력과 냉소, 우울과 싸워보겠다고 교사들이 기를 쓰고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기쁨과 희망, 짜증과 실망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빛나는 추억을 보고 있었으나 동시에 그가 홀로 견뎌야 했을 외로움과 공허, 환멸의 깊이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삶이 밑 빠진 독 같았다. 일개 야학의 노력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거대한 결핍. 그에겐 왜 그만큼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았나.
뒤늦게 새로운 삶을 꿈꾸며 그들은 가족과 시설로부터 자립했다. 그러나 가족에게 소외되고 학교로부터 거부당하고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긴 그들 삶의 거대한 공백은 몇 개의 복지 프로그램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사방이 꽉 막힌 삶. 그는 출구의 열쇠를 얻고 싶어 했다. 야학을 한다는 건 그와 함께 니체를 읽고 연극을 하며 열쇠 찾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었고, 우리에게 장애인 운동이란 기어이 출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4월7일, 우리의 깃발 하나가 사라졌다. 무력함을 견디며 쓴다.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