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걸, 「성소수자 혐오 실태와 사회적 의미」 요약 발제
홍성훈
지난 4월 총선에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슈들 가운데 하나는 기독자유당의 국회 입성 여부와 관련된 것이었다. 동성애와 이슬람 저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전면으로 내세운 기독자유당은 정당 득표 2.64%를 받았지만 3%를 넘기지 못한 관계로 국회 입성이 무산되었다. 이번 기독자유당의 선전(?)은 한국 사회에서의 혐오세력이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사회 혐오세력들은 이제 공공연한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까지 온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정치동력인 ‘혐오’에 대해 정밀하고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며 그에 대한 대응논리가 요청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종걸의 글, 「성소수자 혐오 실태와 사회적 의미」를 토대로 성소수자 혐오의 주체들과 그들의 주요 동력인 혐오라는 감정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혐오를 경험한다. 거의 전 생애에 걸쳐 혐오와 마주한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학교는 성소수자 혐오 발언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수행한 ‘성적지향 •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실태조사’에 의하면 성소수자 학생들이 혐오 발언을 들었다고 대답한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혐오 발언의 주체는 학교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교사와 친구였다. 이는 가정과 직장에서도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성소수자들은 청소년기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발언과 차별을 끊임없이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성소수자 혐오는 성소수자들의 상징적인 고립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 경제생활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측면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직장에서나 단체에서 성소수자임이 밝혀지는 순간 외면당하기 십상이고 그것은 곧 그 조직이 그 /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또한 대개 당사자가 아니라 조직과 구성원들의 의견에 따라 판단이 내려진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이종걸은 성소수자들이 직접적으로 혐오와 마주하는 시기는 그들 스스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타인들에게 드러내는 커밍아웃과 성소수자 운동이 가시화될 때라고 말한다. 막연했던(혹은 잠재적이었던) 주체들이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구체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연예인 홍석천의 사례를 들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무렵 전성기를 구가하던 홍석천은 커밍아웃을 하자마자 그의 커리어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만인의 비난 대상으로 전락했다. 용기 내 했던 커밍아웃이 되려 대중들의 싸늘한 반응만 야기했을 뿐이었다. 결국 모든 방송에서 하차해야 했고 이후 긴 시간동안 대중들에게 모습을 감춘 채 긴 시간을 보냈다. 이는 비단 홍석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커밍아웃을 한 대다수의 성소수자들이 겪어야 하는 일반적인 사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서는 성소수자의 존재가 드러났다. 동성애자 홍석천(그는 커밍아웃 이후 3년 만에 복귀했다)과 트랜스젠더 하리수가 꾸준하게 방송에 출연했고 드라마 작가 김수현은 <인생은 아름다워>(SBS, 2010)에서 게이 커플을 전면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 또한 커져갔는데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책임져라”라는 동성애 혐오를 버젓이 신문광고란에 싣는 등 혐오의 수위도 높아져갔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미디어의 지속적인 현상 속에서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무산 이후 등장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세력들의 반대운동이 조직적, 집단화되었다. 이들은 미디어 속 성소수자의 가시화에 대해 ‘동성애 조장’, ‘동성애 옹호’ 라는 동성애 혐오 표현들로 가득한 문구를 사용하며 반대 운동을 진행했다(61).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혐오 세력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들을 꾸준히 다루는 현상을 단순히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미디어는 성소수자들의 섹슈얼리티를 철저하게 봉쇄한 채 그들의 일부만을 노출시킨다. 앞서 예를 든 홍석천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면 그 또한 미디어에서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표상되고 소비된다. 홍석천은 현재도 방송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데 그의 이름 앞에 놓이는 수식어로 ‘성공한 게이’라는 표현이 놓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미디어는 홍석천의 게이 정체성을 희석시키기 위하여 대부분 그의 이름 앞에 ‘성공한’이라던가, ‘외식사업가’라는 수식어를(그것도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 붙이고 나서야 카메라 앵글 속에 그를 위치시킨다.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커밍아웃 이후 그의 역경과 좌절, ‘극복’의 서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그의 정체성의 핵심 중 하나인 게이 섹슈얼리티는 TV 브라운관을 넘어 대중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또한 이에 대해 개의치 않다는 반응이다. 오히려 그는 동성애자를 자신 스스로 희화함으로써 대중들에게 동성애자의 이미지를 친밀한 것으로 만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친밀함을 넘어서서 동성애자에 대해서 무엇을 더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을 내놓지 않은 상태다. 이 역시 홍석천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들을 재현하고 있는 미디어 전반을 둘러싼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김경태는 이 대중문화현상을 다룬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성애자 가시성의 증가는 자연스레 동성애 혐오에 대한 가시성의 증가를 동반한다. 동성애 혐오 진영은 동성애자들의 존재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 규범적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것이다. 순응과 타협 속에서 정치적 ‘약발’이 다한 커밍아웃에의 안주는 동성애자 가시성을 정체시키고 있다. 커밍아웃이 더 이상 성소수자들만의 특권적이고 정치적인 수사로 한정되지 않고서 잡다한 고백의 상황들을 표현하기 위한 일상적 용어로 탈정치화되어버린 것은, 그것의 정치적 효용성의 종말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미디어에서 동성애자들이 탈정치화된 존재들로 그려진 반면, 현실에서의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은 점점 조직화되어가고 있다. 특히 혐오세력은 초기부터 어떤 집단성을 바탕으로 혐오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베나 어버이연합은 어떻게 혐오라는 감정과 집단성이 결합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충실히 보여주는 혐오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10월 법무부의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드러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선동 세력들의 집단적, 조직적 대응 논리 안에서 한국사회에서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드러나고 있다. (……)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경제적 비용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언론, 정부, 국회 등 주요 기관 내 인적 자원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혐오 표현을 논리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차별선동세력 활동이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구현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내에서 대관 절차를 통해 진행되었다는 것은 국가인권기구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부, 국회, 언론 등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이 담긴 차별선동의 논리를 공적인 언어로 합리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직간접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65).
물론 이 현상은 최근의 것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적층에서부터 쌓아올려진 결과물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독재자들과 권력층은 끈질기게 혐오를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반공은 이승만 정권부터 뻔한 혐오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고, 박정희 군부정권의 호남과 영남 갈라치기와 ‘형제 복지원 사건’으로 표상되는 ‘정상인’과 ‘행려병자’, ‘부랑아’, ‘장애인’의 이분법을 사용해 국민과 비국민으로 갈라놓았던 신군부 시대까지 혐오는 줄곧 권력자들의 도구였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에서 사용되는 혐오 현상은 그 감정의 주체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종걸은 글의 말미에서 혐오의 논리를 공고히 하는 주체들로 정부, 국회, 언론을 꼽았지만 실상 혐오를 생산하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으로 짐작해볼 때 이 문제를 너무 단순화해서 판단하는 것은 자칫 빈곤한 결론으로 내릴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를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혐오는 인류의 발생 초기부터 ‘역겨운 것’, 즉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들을 피할 수 있게 해주며 타자와 구분되는 경계선을 설정하거나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혐오를 뒤집으면 내가 타자에 대해 어떻게 사고하고 있고 또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겨움은 대상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역겹다’고 느끼는 반응의 효과로 만들어”지며 “동시에 역겨움이 단순히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 향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