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가 늦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가족여행을 갔다 와서. 쏘리~
드디어 출범한 혐오담론 씹어먹기 첫 번째 세미나였습니다. 몇 사람이 결석하고 대략 스물 세 명이 참석했습니다. 너무 많나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발언권을 얻기가 어려운 느낌이 있었죠? 하지만 맛난 음식도 살짝 모자란 듯한 게 좋지 않나요? 두 반으로 나눌까 생각도 해 봤지만, 발언을 위한 ‘경쟁’의 여지를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스 민주주의의 동력이 ‘아곤’(agon), 즉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의 경연장'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세미나가 좋은 ‘아곤’이 되기를 바라요.
지난 시간에는 200년 이후 한국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혐오표현의 실태를 살펴보았습니다. 박경석 교장샘의 발제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태도 속에 혐오가 내재해 있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였습니다. 정확히, 장애인에 대한 관용과 시혜의 태도 역시 장애인 혐오의 표현형일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특히, 지역사회의 복지사업을 꽉 잡고 있는 개신교 집단이 장애인에 대한 시혜를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거기엔 장애인 혐오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태도 뿐 아니라, 2000년 이후, 그러니까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장애인의 권리 투쟁이 전면적으로 대두된 이후 장애인에 대한 태도에는 기존의 ‘동정’과 ‘연민’과는 다른 면모가, 즉, ‘무슨 특권계층이냐’, ‘장애가 벼슬이냐’, ‘처 박혀 있지 괜히 기어 나와서 국고를 축낸다’는 식의 ‘적의’가 드러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김도현 님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류승화 선생님의 이주민 혐오에 대한 발제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오원춘 사건’에서 보듯이, 특정 소수집단에 대한 혐오표현은 그 집단을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담론화하는 특징이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검, 경찰의 활동보조 부정수급 조사, 기소 남용에서도 이런 ‘범죄시’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혐오담론이 위험담론과 겹치기 때문입니다. ‘혐오’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을 ‘더러운 것’, ‘나를 오염시키는 것’, 그래서 ‘나를 위험하게 만든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소수집단을 혐오하는 것은 그 집단을 위험한 존재로, 우리를,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존재로, 그래서 우리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보는 태도입니다.
홍성훈 씨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실태와 사회적 의미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 글을 써 오셨습니다. 고생하셨고, 고맙습니다. 성훈씨는 이번 총선에서 기독자유당(2.64%)을 비롯한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정치세력화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라는 문제제기를 해 주었습니다. 기독당과의 분열이 없었으면 3%를 획득, 원내정당이 될 뻔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만 있을 수 없는 사안입니다. 스스로 정치세력화할 뿐 아니라 다른 정당과 개별 국회의원(후보자)에게도 성소수자, 이슬람에 대한 혐오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혐오의 합법화, 혐오의 디폴트화야 말로 우리가 다루는 혐오담론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가 문제삼는 혐오표현은 단지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집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집단의 멸절을 지향하는 태도를 ‘공식화’, ‘법제화’, ‘정상화’ 하는 담론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혐오세력의 ‘혐오’에 맞서 그런 ‘개독교’, ‘한남충’을 ‘혐오’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표현상의 ‘노골성’, ‘선정성’과 무관하게, 우리가 다루는 ‘혐오’표현은 어떤 집단의 ‘행위’가 아니라, 그 집단의 ‘존재’ 자체의 소멸을 지향하는, 그래서 자신의 순수한 정체성을 수립하고자 하는 그런 ‘사회상’, 그런 세계상을 내포한 정념입니다. 물론, ‘노인’ 혐오, ‘개독’ 혐오, ‘한남’혐오가 그들의 존재 자체를 절멸시켜 우리 사회를, 우리 국가를 순수하고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세계상을 진지하게 내포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미러링’의 차원을 넘어선 ‘혐오표현’으로 문제삼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최한별님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선동, 혐오표현의 실태를 보고했습니다. 한별님의 글에서 우리 모두의 경탄을 자아낸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겨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복지예산 때문에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는 정부 발표에 분개하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의 비리와 횡령으로 인해 누수되는 세금이 훨씬, 훨씬 많다는 것을, 짐작은 하면서도 그 곳을 향해 돌을 던지지는 못한다. 던져봐야 가 닿지 않을 먼 곳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보다, 내 옆에, 아니, 내 밑에 있어서 중력까지 도와주는 곳을 향하여 돌을 힘껏 던지는 게 더 통쾌하기 때문이다.”
캬~ 혐오담론의 본질은 바로 그런 ‘중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적 중력 속에서 쉽게, 소수 집단을 공격하기 쉽게 만드는 거죠.
발제가 끝난 후 열띤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크게 ‘혐오’의 개념을 둘러싼 논의와 2000년 이후 혐오표현이 확산된 이유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첫 번째 논의에서 무엇을 혐오표현이라고 할 거냐. 혐오표현의 ‘정의’와 ‘범위’를 어떻게 한정할 거냐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인혐오, 자본가 혐오, 개독 혐요, 한남 혐오라는 개념도 성립하느냐? 하는 문제제기였는데, 류미례 감독님이 우리가 문제삼는 혐오표현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부정적 태도라고 철학적으로, 간명하게 구별해 주셨습니다. 저는 무엇이 혐오표현이고 무엇이 아닌가 라는 ‘조작적’ 정의보다 어떤 역사적, 사회적 상황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정상화’, ‘도덕화’, ‘법제화’ 하는가? 라는 ‘역사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000년 이후에 혐오담론이 대두된 이유가 뭘까? 라는 문제제기가 중요한데, 역시 류미례 감독님이 “2000년 이후의 동성애 혐오가 이전과 다른 점은 어떤 위기감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처럼 ‘그들의 사랑’이 행복해 보인다는 것에 대한 적의, 혹은 질투가 동성애 혐오에 내포되어 있다.”며 기막힌 통찰을 주셨습니다. 혐오표현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입니다. ‘자아’의 위기를 ‘대상’의 위험으로 투사하는 게 혐오표현입니다. 어떤 대상을 혐오할 때 거기엔 나는 상실한 뭔가를 향유하는 대상에 대한 ‘질시’가 깔려 있습니다.
열띤 토론으로 9시 45분이 돼서야 세미나가 끝났는데요, 앞으로 우리 세미나 9시 45분까지 하는 걸로 해요. 나머지 15분은 다음 시간 공지하고요. 다음 시간 텍스트는 너스바움의 <혐오에서 인류애로> 1장과 2장입니다. 발제는 김도현 님이 이미 해서 텔방에 올렸습니다. 각자 프린트 해서 가져 오시고, 프린트가 불가한 분만 텔방에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사회 및 후기, 간식은...앗, 안 적었다. 반장님, 진수씨! 헬프 미! 누구죠? 다음 시간 사회자는 다음 시간 세미나 끝나고 반드시, 지난 시간 결석자를 중심으로 사회(후기)자 정해 주시고, 간식도 아직 정하지 않은 날짜가 있으니까 진수씨랑 상의해서 빈칸 채워 주세요.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만세, 만세. 만만세.
사회 및 후기 현정민
간식은 홍성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