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삶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전상국, <우상의 눈물>
by 깨금이
기표는 악마다. 그것도 ‘순수한 악마’. 도대체 선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순도 100%의 악마. 반 편성되고 첫 시간부터 ‘메시껍게’ 깝쳤다는 이유로 급우의 허벅지에 담뱃불을 지져버리는 ‘이유없는 잔인함’과 채플 시간에 홀로 교실에 남아 친구들의 도시락을 헤치워버리는 ‘뻔뻔함’, 선생님들 눈을 피하지도 않고 버젓이 교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대담함’, 재수파 무리들을 이끌고 여학생 하나 결단내는 것 쯤 예사일로 여기는 극한의 ‘남성성’. 그야말로 악마의 표본이 아닐까?
소설 속에서는 기표가 왜 이런 악마가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추측을 가능케 하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기표의 집안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이다. 아버지가 풍 맞은 폐인이고, 여동생은 버스 안내양을 하다 그마저도 계속 하지 못하고 술집 일을 해야 하는 처지. 그러나 이것이 기표가 악마가 된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집안 환경이 이렇게 열악하다고 모두가 다 기표와 같은 악마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뭔가 납득을 해 보려고 나의 중학교 시절 교실 풍경을 계속 떠올렸다. 어떤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들이 더 주먹질하길 좋아했었나, 생각해본다. 사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선생님들도 수업시간에 입버릇처럼 “대전 최고의 똥통학교”라고 불렀던 곳이었는데, 그만큼 아이들의 집안 환경도 ‘평균적으로’ 다 좋지 못했다. 그래서 ‘가난한 애들이 더’ 또는 ‘부잣집 애들이 더’라는 식으로 얘기하는게 별로 의미가 없어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근처 보육원에서 학교를 다니던 애들이 대체로 불량끼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비율로, 어떻게든 자기 집이 가진 것을 뽐내보려고 안달이 난 애들의 부류의 불량끼도 만만치 않았다. 내 기억에는 두 부류 모두 재수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런 쓰레기들만 없으면 학교 다니기 편할텐데, 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님들은 분명 보육원에 있는 불량 학생들을 확실히 더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보육원 불량학생 대표선수 한 명이 있었다. 어느 날인가 국어 선생이 그 애를 복도로 끌고 나와 온갖 모욕적 언사를 퍼부으며 야단을 치는 장면이 생각난다. 반면 선생들이 ‘부잣집인 척 허세떠는’ 불량학생들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경우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의 선택적인 기억력을 탓해야 하겠지만, 어쨌든 선생들은 ‘학교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제 1의 공격대상을 보육원 불량학생들에게 맞췄던 것 같다.
분명 학교라는 공간에도 ‘밝음’의 영역과 ‘어둠’의 영역이 존재한다. 학교 폭력은 이 두 영역 모두에서 벌어진다. ‘밝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가해자는 언뜻 보면 그런 식으로 욕먹을 애들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항상 웃고, 아이들을 통솔하고, 결정적으로 선생님과 친하다. 오히려 선생님은 이들의 후견인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어둠’의 영역. 이 곳이 아마도 악마의 은신처가 아닐까? 화장실 구석에서 담배연기 뻑뻑대다 수업 종이 치면 ‘씨발’거리며 걸어나오는 아이들. 근데 생각해 보면 이런 얘들하고는 직접 부딪치지만 않으면 별로 불편하지도 않고 대충 남일처럼 쌩까고 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저 ‘밝음’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교활함은 매일같이 마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기표가 악마인 이유는 그의 ‘악마적 행동’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자리하고 있는 ‘악마적 위치’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악마적 행동은 가난한 자든 부자이든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난한 자의 악마적 행동이다. 학교 입장에서는 그들의 가난 자체도 불편할진데, 예의도 없고 사고만치는 게 더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기표와 같은 위치에 있는 아이들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학교생활의 방향은 대충 두 가지 뿐이다. 소심쟁이로 주눅들어 살아가거나, 어둠의 영역에 있을 지언정 당당하게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개기거나. 나는 어떻게 보면 전자의 선택보다 후자의 선택이 그의 삶에는 더 이롭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봐준다 해도 기표의 행동은 화가 치밀어 오르게 만든다. 그의 행동 어떤 것도 납득이 되는 일이 없고, 그저 남에게 피해만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놈 퇴학 안 시키고 학교는 뭐한대요?”라고 유대 어머니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상식적인 발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실제로 많은 학교들이 그런 방식을 택한다. ‘정학’, ‘퇴학’. 유대 어머니는 왜 그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수단을 바로 사용하지 않냐고 투덜댄 것이다. ‘저 쓰레기 같은 악마의 자식을 내가 보는 앞에서 빨리 치우란 말이에요!’
담임선생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겠지만, 조금은 다른 길을 택한다. 담임 선생은 첫 시간 교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육십육 명이 운명을 함께하는 역사적 출항을 선언한다. 목적지에 이를 대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가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 이 시간 분명히 밝혀둘 것은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배의 순탄한 진로를 헛갈리게 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전정할 때 역행 가지를 잘라버려야 하듯 여러분의 항해에 역행하는 놈은 여러분 스스로가 엄단할 수 있어야 한다.”
“고삐는 여러분 손에 쥐어져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고삐를 당겨 여러분 스스로 제어해 주기 바란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여러분 스스로가 내 손에 그 고삐를 쥐여주는 일이다.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나의 강제력이 동원되기 전에 너희들 스스로 규칙을 엄수해서 이 교실의 역사적 출항에 기여하라, 그것이 너희들 ‘자유의지’의 의무이다, 담임 선생이 이 말을 할 때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나는 그런 표정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다 비슷한 상황에서였다. 매년 초 반편성이 끝나고 어색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학생들을 향해, 군주처럼 학생들을 향해 포효하는 담임들. 그들도 언제나 ‘국민주권’스러운 발언을 했다. 그리고 자기들도 폭력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가 매를 더 이상 들지 않도록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해주길 바란다, 너희들에게 고삐를 넘기마.... 하지만 그들의 자세는 언제든지 학생들로부터 고삐를 뺏어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담임의 이런 태도가 93년 김영삼 대통령 이후 20년간의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국민에게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천명한 시대. 그러나 국민들 간의 아름다운 조화와 화합을 깨뜨리는 행동에 대해서는 ‘용서치 않는’ 시대. 폭력은 선명하게 가시화되지 않지만, 유사시엔 언제든 출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1980년에 쓰여졌다는 것이 좀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담임이 생각하는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역행 가지’는 누구인가? 담임은 이 말을 할 때부터 이미 기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담임의 이 연설은 기표 같은 문제 학생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책의 ‘서문’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표를 향한 담임의 이 전략의 목표는 무엇인가? ‘역행 가지’를 잘라버리는 것,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실은 형우가 나중에 말하듯이, ‘구원’이 목표였던 것이다. 담임도 형우도 그렇게 믿었다. 기표를 구원하자. 낙오된 저 아이, 가만히 두면 사회의 쓰레기가 되어 악취를 풍겨댈 저 아이를 구원하자. 나는 담임의 의도 자체는 선한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우리 사회는 그런 시도를 (기표가 가진) ‘악’에 대비되는 ‘선’에 부합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이 ‘선’의 주요 행동 지침은 악마에게서 당당함을 빼앗는 것이다. 즉 기표를 당당하게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아이에서 주눅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순한 양이 되기. 양은 당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구원은 누구를 위한 구원인가. 담임과 형우의 이 구원 작전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유대이다. 선생님이 기표를 부반장으로 임명하려하자, 유대는 “선생님, 기표 한 개인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기표의 힘을 빼어 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묻고, 형우가 기표의 유급을 막기 위해 반 차원의 부정행위를 주도할 때도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냐? 기표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냐?”라는 말로 이들의 의도를 읽어낸다.
그러나 담임과 형우의 어설픈 구원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기표는 담임이 무상으로 제공한 매스게임 추리닝도 칼로 북북 찢어버리고 기어이 다른 급우의 것을 빼앗아 입는다. 그리고 낙제되지 않도록 온 학급이 시험 답안을 알려주려 해도 거부하고, 끝내 자신을 ‘구원’하려 했던 형우를 아작을 내버린다.
그러나 형우는 기표의 악마성을 지배할 줄을 알았다. 형우는 자신을 때린 자가 누군지를 발설치 않음으로써 학교에서 일약 영웅이 되고,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학급 동료를 퇴학의 위기에서 지킨 의인이 된 것이다. 그 이후 형우가 반 학생들을 설득해 어려운 기표의 가정형편을 생각해 모금에 나서도록 하는 것도, 신문기자인 학부형을 동원해 전국적인 모금을 끌어오는 것도 모두 ‘선의’로 가득차 있다. 반면 기표는 이제 ‘무서운’ 악마에서 한낱 ‘동정대상의’ 악마로 전락하고 만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재수파들의 우상도 아니고 그저 동정받는 악마, 불쌍한 악마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구원받은 것인가? 확실한 것은 기표가 어두운 동굴에서 나와 밝음의 영역에 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밝음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그는 힘없는 존재여야 했다. 불쌍하고 갸륵한 존재. 그래서 결국 그는 이 밝음의 영역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그가 다시 어둠의 영역에서 잘 살 수 있을까? 그 전까지는 어둠의 영역에서 그는 거칠 것 없이 당당했지만, 이제는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가난이란 무엇인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가난은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한 삶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보이고, 아무리 구질구질해 보여도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 만큼 많은 우주가 펼쳐지고 있고, 그 우주들이 품은 소중한 보듬살이들이 있다. 그래서 가난은 당장에 보기 싫다고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섣부른 구원도 가능하지 않다. 가끔씩 가난과 짝을 이루기도 하는 가난한 이들의 폭력성 또한 마찬가지다.
지지난주까지 불수레반 한소리반 통합 사회수업에서는 ‘가난’을 주제로 이런저런 작품들을 감상했다.
우리는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을 읽었다. ‘가난’을 도둑맞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실제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난을 도둑맞았다. 아버지 회사의 부도, 그리고 연이은 사업 실패, 그리고 이어지는 가난... 하지만 그 가난을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보려는 주인공과는 다르게 다른 가족들은 한사코 가난과 더불어 살려는 노력을 거부했다. 어떻게 이렇게 비루하고 남루한 삶을 살 수 있냐고. 주인공은 인형 옷 만드는 공장에 나가서 조금의 돈이라도 벌어오려고 하지만, 가족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지켜왔던 중산층의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으로 여기고 주인공만 남기고 다 자살을 해버린다. 혼자 남은 주인공은 ‘가난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가족들이 남기고 간 ‘가난’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가난은 그녀의 숙명이었다. 가난이 삶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낱 ‘빈민 체험’을 하고자 신분을 숨기고 들어온 부잣집 도련님 상훈에 의해 그녀에게서 하나 남은 삶의 이유마저도 능욕당한다. 상훈은 마침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자리에서 그녀를 가엽게 여기며 자기 집에 들어와 허드렛일이라도 거들면 어디 야학에라도 보내주겠다고 선의를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에 그녀는 절규한다.
“도대체 가난을 뭘로 알고 즈네들이 희롱을 하려고 해.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나는 그를 쫓아 보내고 내가 얼마나 용감하게 내 가난을 지켰나를 스스로 뽐내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방은 좀 전까지의 내 방이 아니었다. 빗발로 얼룩얼룩 얼룩진 채 한쪽이 축 처진 반자,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나 더러운 벽지, 지퍼가 고장 난 비닐 트렁크, 절뚝발이 날림 호마이카 상,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와 서로 결박을 짓고 있는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우그러진 양은냄비와 양은식기들―, 이런 것들이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어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무의미하고 추했다. 어제의 그것들은 서로 일사불란 나의 가난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어제의 그것들은 분해되어 추한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판잣집이 헐리고 나면 판잣집을 구성했던 나무 판대기, 슬레이트, 진흙덩이, 시멘트 벽돌, 문짝들이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가 되듯이 내 가난을 구성했던 내 살림살이들이 무의미하고 더러운 잡동사니가 되어 거기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마무리
담임과 형우는 기표를 구원하는데 성공했는가? 성공했다고 본다. 문제가 있다면 그 구원받은 삶을 결국 또 기표가 거부한 것인데, 사실 담임에게는 그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기표와 2학년 13반의 일화를 영화화 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게 안타깝고 분할 뿐이다. 그렇게 영화제작이라는 보너스 수입은 놓쳤지만, 결국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들은 말은 ‘구원’이라 했지만, 결국 기표를 ‘제거’하는게 목적이었으니까. 기표가 어둠에서 구출되어 나와 순한 양이 되든, 어디론가 사라져 없어져버리든 사실 같은 거니까.
우리 사회가, 학교가, 악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한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그 악을 제거하고자 ‘선’을 자임하는 이들의 행동이 더 큰 폭력을 낳고 악의 존재 이유를 더 풍부하게 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왜 그가 ‘악한 자의 위치’로 내몰렸는지를 인내를 갖고 직시하는 것이다. 구원은 ‘악한 자의 위치’로 내몰린 자가 스스로의 내몰림을 직시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jm
2013.12.08 20:54:07
유난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한주가 지났는데도 여러 생각들이 겹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