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08 18:54:39
강여사
.......발제문이라기 보다는 짧은 에세이
20131106 현장인문학, 카프카 『변신』
강혜민
# 벌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벌레’가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입맛도 변했다. 그는 그가 좋아하던 우유가 아닌 치즈와 썩은 야채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벌레’가 된 그는 회사에서도 해고된다.
그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는 또 어떠한가. 아버지는 분노하고 어머니는 놀라 쓰러진다. 여동생만이 그의 상황을 천천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침내 “저것이 어떻게 오빠일 수 있겠느냐”라고 외치며 ‘벌레’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먼저 말하는 것도 여동생이다.
소설에선 바퀴벌레와 같은 갑충류로 그레고르의 외관을 묘사한다. 그는 분명 입맛도 변하고 전과 달리 천장을 기어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고 타자를 배려한다. 자신이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가족을 염려한다.
“음악에 이렇게 감동을 하는데도 내가 동물이란 말인가? 그가 열망했던 미지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나타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여동생 앞까지 나가서 스커트를 잡아당기며 동생더러 바이올린을 들고 자기 방으로 와달라고 암시를 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사람 중엔 아무도 자기만큼 열렬히 연주를 감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298쪽
“내가 동물이란 말인가?”라는 물음. 동물과 동물 아닌 것, 벌레와 벌레 아닌 것의 차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소설에서 벌레는 단지 외관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속성의 변화만도 아니다. 그는 분명 입맛이 변하고 천장을 기어 다니기도 하나, 그 스스로 자신에게 물음을 품듯 사유하고 타자를 염려한다. 벌레와 벌레 아닌 것이 그 안에는 혼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벌레’로서 존재케 하는가.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회사 지배인, 하숙인, 파출부 등 그를 대하는 타인들의 반응으로 ‘벌레’의 모습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나는 무엇을 혐오하며 낯선 타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는 누군가를 ‘벌레’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성소수자(장애인)를 혐오하는 이들을 혐오하는 것은 성소수자(장애인)를 혐오하는 이들의 혐오와 무엇이 다른가.
어떠한 것을 ‘벌레’라고 규정하는 단단한 외벽의 한 퍼즐이 나라면 이 질문은 곧 나를 향한 질문이 된다. 내 안에서 벌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나 자신이 그에 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그레고르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출근을 한다. 아버지 사업 실패 후, 가족 부양은 그레고르의 몫이다. 소설 속 그레고르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부장제 질서 속에 있는 ‘가장의 자리’로 대표되는 아버지의 삶과 닮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 속 ‘아버지들’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그레고르 = 벌레 = 아버지’로 동치되는 그것은 현실 속에서 한때 혐오(분노)의 대상이었으나 또한 연민의 대상이고 슬픔이기도 한 아버지의 삶이다. 아버지의 삶은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 비의지적인 것이었고 그는 거기서 살아내야 했다.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 ‘-의 아버지(혹은 남편)’으로서 소유격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 또한 가족을 사랑하고 염려하고 배려했던 그의 선택이었다, 라고 말하기엔 그 삶은 너무 가혹하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아버지․어머니의 아들이자 오빠’,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즉 노동 불가능한 삶에 처했을 때 그는 골방에 갇힌다. 가족은 그의 존재를 잊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가장 지키고자 했던 것(가족)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그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삶을 보내는 동안 가장 소중했던 것으로부터 멀어졌다.
나의 아버지는 퇴직금으로 가족의 빚을 청산한 이후에야 자신의 삶을 반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33년 동안 그의 일과의 전부였던 노동이 쑤욱 빠진 이후에 그 일과를 채웠던 것은 대부분 술이었다. 그는 “가족이 최고다”라고 말했으나 정작 그 말은 늘 그가 가장 사랑했던 가족에게 와 닿지 않았다. 가족에게 그는 자주 술을 마시는, 서럽게도 지긋지긋한 사람이었으니.
이제 늙은 아버지는 누가 돌볼 것인가. 썩은 사과가 등에 박힌 납작하게 마른 벌레를 누가 돌볼 것인가. 그의 삶과 나의 삶, 그와 나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희생에 기대어 살아온 나는 그 희생에 ‘보답’해야 하는가.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서 나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돌본다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라는 것이 오늘날의 정언명령에 차라리 더 가깝지 않은가.
바카스
2013.11.11 10:41:38
참 열띠었던 날이었습니다.
카프카는 아무래도 한국 중증장애인의 현실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송파자립생활센터 김준호소장님(성함이 맞나요? ^^)의 이야기부터
젊은 나이의 친구들의 다른 삶에 대한 바람, 경제능력을 통한 자립생활의 가능성 마련대책과 어머니 세대의 노후대책에 대한 해결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특히 인상에 남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주말에 호식이형, 백구, 상희누나와 함께 다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보니 또 다시 보이는 것이 있네요.
자립생활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 무엇을 만들어낼때 다르게 사는 것이 지속가능한가.. 또 한 번 열띤 토론 하러 가겠습니다.
수요일에 만나요~
우니
2013.11.12 19:21:27
댓글에 저도 살짜궁 추가...;ㅅ;
현장인문학 「변신」 읽기.hwp
아무도
2013.11.23 20:44:29
제이름은 김준호 아니구요 송파솔루션장애인자립생할센터 김준우입니다.
그대가 나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면 그대에게로가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다.ㅎㅎㅎ
너무 잼난 토론이였습니다. 감사감사~^^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