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30 16:27:23
죠스 대리자 ㄴㅁ
죠스 님의 페이스북에서 퍼왔습니다.
죠스가 허락했어요.
모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알리고 함께 할 수 있는 장을 더 많이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침묵과 멸시의 원인을 단순히 '모름'에서 찾는다면 전략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을 듯. 과연 우리가 사회적 살인, 추방, 파괴, 방치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끔찍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무감한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많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수록 나는 더욱 잘 살게 될 것이다", 타인의 죽음, 열등한/비정상적인 인간의 죽음이 나, 나의 가족, 나의 국가 나아가 인류를 더 건강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적극적인' 관점 혹은 믿음이 침묵과 멸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오늘 노들장애인야학 장애학 세미나에서 읽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국가, 사회, 조직 그리고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인종주의 논리.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권력이 책임을 떠맡은 생명의 영역 안에 어떤 단절을 도입하는 수단이다. 즉 살아야 하는 것과 죽어야 하는 것 사이의 단절이다. 인간이라는 종류의 생물학적 연속체 안에 여러 인종들이 나타나고, 인종들을 구별하며, 등급을 매기고, 좋은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이 모든 것은 권력이 떠맡은 생물학적 영역을 조각내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종주의는 인간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수록 너는 더욱 살게 될 것"이라는 식의 적극적 관계를 정립한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소위 열등한 등급이 매겨진 루저들은 '죽게 내버려'둬도 되는, 아니 죽게 내버려둬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월한 인간, 좋은 인간, 정상적인 인간, 즉 암묵적으로 '나'로 규정되는 인간의 삶의 위협하거나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열등한 인간, 나쁜 인간, 비정상적인 인간, 그리고 비인간은 죽어도 되는 존재, 어느 정도 죽어서 사회의 발전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죽음, 파괴, 내몰림이 계속 이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말로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누군가의 죽음과 내몰림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혹은 앞으로 올라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그 자리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해고, 파괴, 죽음, 죽음, 죽음, 죽음..... 그 수많은 죽음 앞에서 삼성의 순수익에 감탄하고, 기업의 생존을 이야기 하고, 국가의 품위를 운운하고, 국민 행복을 외칠 수 있지.
이런 점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냐, 누가 누구를 차별하느냐의 지점이 아니라,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푸코의 글은 섬득하게 다가왔다. 특히 그는 특정 국가나 사회, 민족, 인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위해서'라고 외칠 때 '우리' 혹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고방식 역시 들춰내기 때문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경계해야 하는 사고방식. 어떻게 또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
"사회나 국가, 혹은 국가를 대체할 그 어떤 것이 기본적으로 생명을 떠맡고, 그것을 관장하고 증식시키며, 그 우연성을 보완하고 그 기회와 생물학적 기능성들을 점검하고 한정시킨다는 이념은 고스란히 사회주의에 의해 다시 채택되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을 죽일 권리, 말살할 권리, 자격을 박탈할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소련 같은)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는 인종주의 (민족적인 인종주의라기 보다는 진화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인종주의)가 정신병자, 범죄자, 정적들에 대해 완벽하게 행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를 위해서였다."
아니면 오히려 "많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수록 나는 더욱 잘 살게 될 것이다", 타인의 죽음, 열등한/비정상적인 인간의 죽음이 나, 나의 가족, 나의 국가 나아가 인류를 더 건강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적극적인' 관점 혹은 믿음이 침묵과 멸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오늘 노들장애인야학 장애학 세미나에서 읽은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국가, 사회, 조직 그리고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인종주의 논리.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권력이 책임을 떠맡은 생명의 영역 안에 어떤 단절을 도입하는 수단이다. 즉 살아야 하는 것과 죽어야 하는 것 사이의 단절이다. 인간이라는 종류의 생물학적 연속체 안에 여러 인종들이 나타나고, 인종들을 구별하며, 등급을 매기고, 좋은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하는 이 모든 것은 권력이 떠맡은 생물학적 영역을 조각내는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종주의는 인간들 사이에서 "많은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수록 너는 더욱 살게 될 것"이라는 식의 적극적 관계를 정립한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소위 열등한 등급이 매겨진 루저들은 '죽게 내버려'둬도 되는, 아니 죽게 내버려둬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월한 인간, 좋은 인간, 정상적인 인간, 즉 암묵적으로 '나'로 규정되는 인간의 삶의 위협하거나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열등한 인간, 나쁜 인간, 비정상적인 인간, 그리고 비인간은 죽어도 되는 존재, 어느 정도 죽어서 사회의 발전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죽음, 파괴, 내몰림이 계속 이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말로 보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누군가의 죽음과 내몰림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혹은 앞으로 올라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그 자리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해고, 파괴, 죽음, 죽음, 죽음, 죽음..... 그 수많은 죽음 앞에서 삼성의 순수익에 감탄하고, 기업의 생존을 이야기 하고, 국가의 품위를 운운하고, 국민 행복을 외칠 수 있지.
이런 점에서 누가 누구를 죽이냐, 누가 누구를 차별하느냐의 지점이 아니라,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하는 푸코의 글은 섬득하게 다가왔다. 특히 그는 특정 국가나 사회, 민족, 인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위해서'라고 외칠 때 '우리' 혹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고방식 역시 들춰내기 때문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경계해야 하는 사고방식. 어떻게 또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
"사회나 국가, 혹은 국가를 대체할 그 어떤 것이 기본적으로 생명을 떠맡고, 그것을 관장하고 증식시키며, 그 우연성을 보완하고 그 기회와 생물학적 기능성들을 점검하고 한정시킨다는 이념은 고스란히 사회주의에 의해 다시 채택되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는 사람을 죽일 권리, 말살할 권리, 자격을 박탈할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히 (소련 같은)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는 인종주의 (민족적인 인종주의라기 보다는 진화론적이고 생물학적인 인종주의)가 정신병자, 범죄자, 정적들에 대해 완벽하게 행사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를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