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8 22:26:52
시라소니
처음으로 합동으로 발표와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저녁을 건너뛰고 온 관계로 간식이 주식이 되고 주식이 과식으로 이어져
혈액이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로 몰리는 바람에
좀 맹한 상태에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저런 얘기가 많이 오갔는데 제가 임의로 개인적 소회를 첨가하며
그 얘기들을 기록과 기억에 의지해 풀어보았는데
글이 생각보다 많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본의 아니게 춥고 배고픈 한 주를 보냈습니다.
(오랫만에 한국 와서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허겁지겁 먹다가 지난 수요일처럼 과식해서 해롱해롱대고....)
등 따습고 배부른 한 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에게도 그리고 여러 분에게도
시라소니
장애학 세미나 제4주 (11/14) “인격체와 비인격체” 후기
또 한 편의 인류학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지난 주의 글이 정태적 문화이해를 기반으로 다른 사회의 장애문제에 어떻게 적절히 개입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글이었다면 이번 글은 인간/비인간 그리고 인격체/비인격체의 구분이라는 인간에 대한 범주 일반을 다루며 장애는 이런 분류에 의미 있는 하나의 요소로 등장합니다. 문화적 접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훨씬 정교하고 동태적인 문화개념을 가지고 주제에 접근한 글이었습니다. (다소 장황한 이론의 현시에 비해 실제 분석이 좀 초라하다는 느낌을 주긴 합니다.)
비서구 지역의 연구인만큼 아프리카의 송게족이든 보르네오의 푸난바족이든 그들 문화의 공통적 요소로서 ‘관계성’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개인’을 하나의 절대단위로 상정하고 그 속성과 본질에 입각해 인간을 파악하는 근대서구의 시각과는 달리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비서구 사회에서 드러나는 어떤 ‘집단성’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관계성은 개인 중심의 장애문제 접근 보다 우월한 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라는 다소 냉소적인 반응이 있었는데 이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인류학적 접근법 자체에서 오는 어떤 불편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 제국주의에 기원을 둔 인류학은 이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이에 기반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성찰’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진 학문으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우월한) ‘서구의 관찰자’ 대 (열등한) ‘비서구의 관찰대상’이라는 힘의 배치에 의존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령 다른 문화의 어떤 면을 서구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평가할 때조차도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자 사이의 위계는 남는 것이지요. 어차피 모방하기 어려운 것을, 타문화에 대한 존중심도 없는 사회의 일원들—서구의 인류학자—이 칭찬하는 것이 주는 무의미함 내지 불쾌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관계성조차도 송게족에서도 그랬듯이 그 관계성에서 일찌감치 폭력적으로 배제되는 이들—쌍둥이의 한명, 중증 장애인, 마녀 등을 제외한 관계성이고 그 관계성 자체로 인해 억압되는 이들—사생아, 미혼자, 자식이 없는 자 등—이 있다는 얘기도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서구의 눈에는 특이한 것처럼 보일지 모지만 우리 눈에는 그리 유별나거나 독특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위의 태도와 괘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지적은 우리가 서구적 시각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하나의 서구적 시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인류학적 연구대상이 되는 비서구 사회들이 실은 시간적으로 ‘전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전근대적’ 삶이 가진 공통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지요. 서구/비서구의 구도는 근대/전근대의 구도이기도 하며 다른 시간대의 공시적 공간 배치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이미 명백히 표현된 오래된 서구의 세계파악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장애를 보는 시각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 점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계성에 이어 비서구 사회의 공통점으로 등장한 것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구별의 부재 내지 불명확성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점이기도 합니다. ‘장애자’가 근대와 더불어 탄생한 범주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이것이 과연 보통 얘기하는 대로 근대적 노동력 동원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전근대 사회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낙인찍기나 사회적 배제도 근대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평가에 별다른 반론을 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점에서 전근대 사회라고 해도 무방한 푸난바족과 같은 전통사회에서 과연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적었을까하는 회의가 많이 표현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 회의는 앞서 얘기한 인류학적 접근에 대한 의혹에도 기인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뭔가를 배우자하는 것이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시대착오적 복고주의를 부추긴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근대적 ‘장애(인)’ 범주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이것은 이미 여러 사람에 의해 반복적으로 표현된 바 있습니다—범주의 부재도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장애인’이라는 부정적인 범주로 낙인찍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함께, 신체적 손상으로 인해 분명 다른 이들과는 구별되는 지점이 있고 그에 따른 다른 필요와 요구가 있는 이들을 손상이 없는 이들과 ‘동등하게’ (혹은 동등한 듯이) 대접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의식도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연 푸난바족 사회에서 장애인이 비혼자같은 다른 비장애-비인격자와 동등한 지위를 누렸을까하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국가가 복지를 위한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근대국가 체제에서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필요악이라는 인식과도 관련이 있겠지요. 일전에 얘기된 노르웨이나 핀란드식의 범주 구분 없는 노동력 손상에 따른 일률적 복지제도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장애인의 문제를 다른 소수자들이 겪는 문제와 연결시켜 보려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일전에 화재로 사망한 중증장애인이 겪은 불행은, 예를 들면 (질병을 가진) 독거노인이 가진 문제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점에서 장애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소수자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이것은 장애인 운동이 비장애인 운동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독거노인뿐만이 아니라 예를 들면 푸난바족 사회처럼 근대국가도 기혼자를 독신자들보다 우대하는 차별정책을 공공연히 시행하고 있지요.) 소수자들은 종종 국가가 제공하는 제한된 자원을 놓고 누가 더 차지하느냐의 싸움에서 서로 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싸움의 이면에는 공리주의에 입각해 자원을 분배해 온 근대국가의 운영원리가 있고 의미있는 연대를 이루지 못할 경우 국가는 상위의 시혜자로 남고 소수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리게 되는 기막힌 경우가 연출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연대는 장애인 운동을 위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전통 가운데도 뭔가 되살린 만한 자원이 없겠는가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류학 보고서를 읽으며 타문화에서 뭔가 배우려 시도한다면 우리의 전통에 대해서도 합당한 주목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는데 전통적 가족상에 기대는 부양의무제 말고 뭐가 있는냐는 답변에 그 ‘가족’이라는 것이 실은 지극히 근대적 구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반론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전통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주는 것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가 얼마나 과거와 심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교재에도 전근대 한국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고 실제로 실을 것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통이니 관습이니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과거와는 다른(혹은 다르다고 믿고 있는) 시간대에 살고 있고 설혹 과거가 아름다워 보여도 그것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려는 노력은 보통 시대착오적 시도라는 것이지요.
부양의무제에 이어 과연 장애인 문제를 국가에만 의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과연 국가가 수많은 장애인들의 다양한 필요와 요구를 충족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국가가 그런 의무를 행해야 하는가?”라는 두가지의 질문으로 물어질 수 있을 텐데 전자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자가 전혀 의미없는 질문은 아니지만 국가가 엄청난 자원과 권력을 독점하면서 약자를 보호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국가의 존재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제대로 그 의무를 이행한다해도 어떤 ‘헛헛함’이 남지 않겠는가를 두고 많은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젖동냥으로 심청이를 키운 심봉사 얘기가 소수자를 그 안에서 돌보는 공동체의 미덕을 보여주는 예로 제시되었고, 젖동냥하면서 동내 여자들 눈치 보며 우는 심청이 제 때에 젖도 못주고 살았을 심봉사의 비참함은 왜 생각하지 않느냐는 설득력 있는 반론도 제기되었습니다.
여기서 얘기된 것이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 혹은 국가가 담당해야할 적정한 복지의 한계 같은 일반적 문제제기보다는 활동보조와 같은 기본적인 배려 없이는 정상적인 삶 나아가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것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막론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어떤 의무를 암묵적으로 강요하게 될 때 장애인은 모든 관계에서 도움을 구걸해야하는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헛헛함’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의 걱정이고 우선은 ‘비참하지 않는 인간관계’ 그리고 나아가 ‘생존’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만 국가의 도움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관계성을 창출하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흥미롭지만 답해지지 않은 몇 몇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마녀’는 과연 누구인가? 어떻게 마녀가 되는가? 장애가 공공연히 얘기될 수 있는 데 반해 왜 ‘추함’을 공공연히 얘기하는 것은 금기인가? ‘낙태’는 어떻게 결정되고 이루어지는가? ‘개종’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 우리도 인류학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발제자가 제시한 푸난바족의 인격개념과 피터 싱어로 대표된 서구의 인격개념의 비교는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흥미로운 연구주제가 될 듯합니다.
인류학 작업에서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에 비해 우월하다 혹은 열등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우리의 가치판단, 문제파악 방식, 문제에 대한 대처방식 등이 어떤 '진리의 영역'—예를 들면 의학과 같은 과학적 담론—에 기대어 올바르게 문제를 파악하기 보다는 의학적 담론을 포함해 그 안에는 숱한 금기와 편견, 왜곡이 작동하고 있는 전통과 관습의 영역, 타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려는 폭력적인 힘의 논리와 그 논리를 정교화한 이론들(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이론들), 그리고 사태를 전생, 후생, 내세를 끌어들여 왜곡하는 종교적 믿음들이 어떤 상징체계를 구성하고 있으며(기어츠), 어떻게 주류적 담론이 되는 지(푸코)를 치밀하게 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류학적 접근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걸 넘어서 상당한 의의를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이 ‘장애인 문화’를 포함한 ‘소수자 문화’에 의미있는 접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점에서 “우리 모두는 인류학자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월한 시선으로 타자를 오만하게 정의하고 평가하는 다수자로서가 아니라 호기심과 공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귀퉁이의 안팎을 오가며 때론 관찰하고(etic) 때론 참가하며(emic) 자신과 그 귀퉁이 모두의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이로서 말입니다.
시라소니 한 마리가 황량한 서울의 들판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중입니다. ㅎㅎ
전근대와 부족의 사례의 차이점(도덕감과 환경이라는 측면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독거노인의 생활 보조의 차이,
복지와 '헛헛함'의 연관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잘 읽었습니다.
시라소니
책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저리 주저리 나온 얘기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나중에라도 누군가에게 혹시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생각할 거리는 넘치는데 답은 없고 문제제기만 잔뜩입니다.
나중에라도 누군가에게..왠지 더 맘을 풀고 장애학시간에 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이놈의 머리가 말 따라가기 급급하지만..샘 말씀대로 화이팅!!!!
김택균샘. 노들세미나 하시는구나, 이제 알았네. 샘 후기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