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31 11:24:56
시라소니 http://commune-r.net/xe/index.php?document_srl=1235976
제가 후기를 쓸 차례는 아니지만 첫 세미나를 하면서 느꼈던 이러저러한 것들을 정리해본다는 생각으로 몇 자 남깁니다.
발제에 이어 맨 처음 논의된 것은 장애인을 보는 시각 자체의 난점이 아니었나 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한 개입은 종종 긍정적 인식이라는 반동적인 반응의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 역시 긍정/부정의 대립쌍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장애(인)에 대해 좀 더 정치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전체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여러 참가자들의 장애인과 얽힌 구체적 체험에 입각한 반응들이었습니다. 제가 그런 경험을 결하고 있기에 개념적으로만 장애(인)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면 다른 많은 분들은 직접 체험한 어려움, 당혹스러움, 그리고 이런 경험에 입각한 제언들을 다양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잠깐 언급되었던 텍스트가 텍스트의 외부, 즉 ‘현장’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여준 하나의 예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가 비교적 정연히 드러낸 장애학 성립의 역사가 그 안의 지식과 정보 그리고 개념의 통로를 따라 그 안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자신의 특별한 경험과 연결되며 다시 그것을 반추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온 듯합니다.
여기서 장애/인의 문제가 ‘장애학’이라는 학문의 분과를 통해 개념화되고 일반화될 때 얻는 것이 무엇이고 잃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논의와 다시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맑시즘과 페미니즘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한 연구들이 그러했듯이 ‘현장’의 실상과 체험이 데이터가 되어 ‘강단’에서 연구되고 역으로 현장을 재정의, 재구성하는 프레임이 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물론 학문의 깔끔함과 현장의 껄끄러움이 만나고 조응하는 지점과 방식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장애학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하나의 질문으로 던져본 것입니다.
합동토론에서 나온 얘기들을 정리해 보지요.
1) 전국민을 상대로 노동력 손상도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노르웨이의 보편적, 통합적 복지모델에서 보듯 ‘장애’라는 부정적 개념 없이도 장애인에 대한 필요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있었지요. 우리가 그런 모델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도 우생학에 입각한 장애인 단종 같은 폭력적 조치를 일찍부터 취해온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듯이 국가에 많은 것을 의지하는 것도 잠재적으로 위험하다는 반론이 있긴 했지만 장애를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은 물론 장애라는 담론이 갖는 효과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내포한 문제제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애란 실은 결정적 단절의 지점이라기보다는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에 문화적,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잠정적 합의의 선을 그어 ‘차별화’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고 그 효과도 일률적이기보다는 다양하고 복잡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는 타당한 듯이 보이는 담론이 법적으로는 장애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또 이런 충돌이 예상치 못한 다른 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고 생각됩니다.
2) 장애를 대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장애란 가능하면 피해야하고 치유되어야 할 부정적 요소로 인식하면서 어떻게 그것을 긍정하고 정체성의 일부로 삼으며 나아가 자부심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 모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존적 태도에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불행을 원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불행은 늘 우리 주변에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건재하며 아마 앞으로 그럴 것입니다. 그리나 그 불행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로 손을 내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니체가 “이 끔찍한 삶이여, 다시 한번!”이라고 외쳤던 태도가 이와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제니퍼 솔닛의 <지옥에 세워진 천국>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3)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좀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얘기해야겠군요. 한 참석자가 “장애인들에게 ‘명예’를 부여하는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장애의 부정적 증상(예를 들면 환청이나 환각) 등을 역으로 자신들이 긍정적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소재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은가하는 얘기였습니다. 장애인들이 가진 것, 보여주는 것들에 대해 비장애인의 눈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설사 그것이 의료적 관점에서 지극히 문제가 된다하더라도—그들의 공동체, 그들의 문화 속에서 정당한, 나아가 당당한 속성으로 인정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거기서 자부심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할 텐데 여기서 그런 운동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할 듯합니다. 장애인들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경우라면 장애인 활동가, 활동보조인 등의 비장애인이 주체가 되어야 할 텐데 그들이 어떤 권한으로 이런 운동을 주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역으로 그들에게 이런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제기한 여러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제가 접할 기회가 없었던 장애인 자신들의 목소리, 그리고 그들과 같이 하며 그들을 돕고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견해를 많이 접하고 싶습니다. 쓰고 보니 별 내용도 없이 장황한 얘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초짜의 긴 인사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너무 잘 읽었습니다. 정리를 너무 잘해주시네요^^
프레임을 갖는 이유는 전에 김도현 선생님이 말한것처럼 언어,글이 갖는 힘이랄까요, 정의하고 예시를 들어 보여주고 그것이 장애인 당사자나 그 주위 비장애인들이 대충이라도 훍었을지라도 다시 경험과 조우하며 갖는 느낌들이 다시 생각을 해보는 기회를 갖는 것들이요
장애인의 정체성의 긍정은 저도 같은 생각을 가졌는데요 장애 비장애를 넘어선 개인 실존 차원에서의 문제이며 불행은 자신을 더 뚜렷히 인식할수있는 그리고 살아내는 힘을 얻을수 있는 불행한 기회라고 말한다면 너무 철없는 말인가요? 기본적으로 생활상에 있어서 비 장애인과의 차이점이 없어야 되겠고 쉽게말해 최소한 서민과 중산층 정도의 생활력을 확보해야 말이 나올것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여러 정서적 공감과 발견등을 규호씨가 어렵게 입을떼고 말해주었는데 선생님이 말하신대로 이걸 끌어내주고 뭔가로 생성해내는 것으로 만들 주체의 상대를 누가 무슨 의무와 막연함으로..하느냐라고 저는 샘의 말을 이해하는데 맞나요???저도 그날 뭔가 참 답답했습니다 저도 현실을 잘 몰라서요. 어쨌든
그러니까요. 우연한 만남과 우정,사랑이 만들어내지않을까요??^^^^~~~ 2장 책부터 빨리 읽어 봐야겠네요.
시라소니
장애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의 하나로 보고 삶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린 불행과 어떻게 타협하며 화해하며 살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본 것입니다. 미리퐁님의 견해와 저의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박카스님의 장애인과의 관계 발언은 제가 쓰지는 않았는데 저는 정서적 공감을 만든다는 면보다 나의 기대와 예상이 어긋날 수 있는 타자와 어떻게 '윤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했습니다. 공자 운운한 것은 공자의 윤리학이 실은 '나'와 '너'와의 관계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철학적, 추상적 논의보다는 구체적 관계, 예를 들면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이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한 지 등을 구체적 맥락에서 얘기하는 것이 필요한 듯합니다. 도움을 주고 받는 특별한 관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용자/사용자 대 피고용자/노동자의 일반적 관계도 그 안에 있고, 이 하나만도 많은 논의가 필요한 듯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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