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묻지 않은 깨침에 대하여 + 학자와 시인에 대하여

by 손오공 posted Jul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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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5 00:17:53


기어가는 ㄴㅁ                 

20120404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_ 기어가는 ㄴㅁ

‘때묻지 않은 깨침에 대하여’, ‘학자에 대하여’, ‘시인에 대하여’ 이 세 편은 심연에 대한 이야기다. 차라투스트라는 심연에 접근하지 않고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 학자, 시인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모든 심연은” “나의 높이까지” 올라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때묻지 않은 깨침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아이를 출산할 것처럼 만삭이 돼 드러누워 있는 달을 비판한다. 그 달은 만삭인 체 속이고 있을 뿐 출산할 수 있는 여인이 아니며, 수줍어서 밤에만 돌아다니는 몽상가,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수코양이에 불과하다. 차라투스트라가 비유로 표현한 달은 참을성 없이 조급한 위선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순수한 깨침에 이르렀다는” 자들이며 “때묻지 않은 앎”을 추구한다. 이들이 앎을 추구하는 방식은 “거세된 곁눈질”인 “관조”이다. 관조란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과 바라보는 나 사이를 분리하는 거리두기 행위다. 관조하는 자가 대상에 가까이 접근하면 부분밖에 보지 못하고, 대상과 섞이게 되면 혼돈에 빠질 것이다. 그렇기에 멀찍이서 바라보며 고상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추구한다. 이런 방식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순진 무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비판하며, 아름다움이란 창조, 생식, 생성을 기뻐하는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창조하려는 자, 그런 자의 순수한 의지에 있다고. “내가 의지를 다 기울여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내가 사랑하고 몰락하고자 하는 그런 곳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학자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를 양에 비유한다. 양 한 마리가 다가와 내가 머리에 쓰고 있던 담쟁이 덩굴로 엮은 관을 먹어치웠다고. 학자라는 무리가 차라투스트라에게 씌워져 있던 학자라는 타이틀을 빼앗은 것이다. 왜? 차라투스트라가 학자 자신들과는 다른 형태의 학자인데도,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차라투스트라 역시 “학자들이 살고 있는 집을 뛰쳐나왔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역시 학자라는 타이틀이 싫었다는 얘기다. 차라투스트라의 학문(학문이라면 학문, 앎)은 심하게 달궈져 화상을 입을 정도인데, 학자들의 것은 서늘한 상태다. 체계화되고, 규칙적이고, 공고하며 시계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저들은 능란하고, 영리한 손가락을 가지고 ‘정신’을 완성하는 일에 몰두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학자들이 하는 짓이 “여름 들녘의 황금빛 환희”나 “곡식”을 얄팍하게 해석하는 정도다. 환희나 곡식의 아주 작은 부분인 부스러기나 먼지 수준이기에, 지금처럼 존엄과 존중을 받기엔 과분하다. 차라투스트라는 학자들을 넘어, 학자들 위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학자들이 몰두하는 체계와 질서 그 밑바닥 혹은 그것 너머에 존재한다고. 차라투스트라가 몰두하는 분야 자체가 그들의 범주 너머에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과 차라투스트라 사이에 “방음층”을 끼워 놓고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듣기를 거부한다.

‘시인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시인 역시 심연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관조하며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심연, 불가해한 세상의 에너지, 근거 바깥에 존재하는 혼돈의 덩어리에 관심을 보이기보다 “풀밭에, 그리고 외딴 산허리에” 누워 아주 진지하게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시인이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시인이 노래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 하늘 위에 있는 것, 신 같은 것에 대해 시인의 궤변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은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노래하고 있지만, 그것은 “형형색색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저들 시인의 감정은 “바다 밑바닥까지 잠겨본 일이 없다.” 차라투스트라가 시인을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깊게 보이고자 하지만 얼치기, 불순한 자일 뿐이다. 시인은 ‘바다’라는 거대한 아름다움, 심연 안에서 낚은 “낡아빠진 신의 머리”이자 “돌덩어리” 따위와 같다는 것이다. 시인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모방하고, 허영심에 빠진다. 모래처럼 척박하고 보잘 거 없는 정신을 가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허영심에 대해 지쳐 있다.

“모든 심연은 올라와야 한다. 나의 높이까지! 내게는 이것이 곧 앎이니.” 차라투스트라는 나라는 개별자와 세상이 만나는 방식이 태양과 바다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의지와 사랑, 창조의 열망으로 타고 있는 태양은 “바닷물을 빨아들여 그 심연을 자신의 높이에까지 들이마시려”하고, “바다는 태양의 갈증이 자신에게 입맞춤하고 자신을 마셔버리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대기가 되어 높이 올라 빛이 흐르는 길이 되고 스스로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앎의 방식, 세상을 노래하는 방식이 심연과 닿아있어야 한다고, 심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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