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장애학세미나 후기입니다.

by 손오공 posted Aug 1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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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8 06:22:01


허신행


2012. 11. 7 장애학 세미나 후기. 뉴미조 신행.

 

  제 기억과 노트에 기대어 쓴 후기입니다. 다른 분들의 말씀을 제 나름대로 해석을 거쳤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댓글로 수정 또는 조언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세미나의 발제 내용은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중 “제4장 왜 장애인이 되었나?” 부분이었습니다. 이 발제문은 아프리카의 송게족 부족사회에서 장애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인류학적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게시판의 발제문을 참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뉴미조에서 시작은 ㅎㅅ 형의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송게족 사회에서 비정상적으로 구분되는 아이의 범주 중 부정한 아이, 결함을 지닌 아이들이 받게 되는 미움 혹은 그 악담을 밝혀내고 분해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규범적인 사회에서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논의를 했습니다. 소위 다르게 함께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주류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예민하게 알아내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어서 보조기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송게족은 간단한 보조기구를 이용하고 보다 발전된(?) 형태의 보조기구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기초적인 형태의 자신의 것을 이용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조원들은 첫째로 몸이 보조기구에 맞춰지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보조기구라고 하더라도 소위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써 왔고, 거기에 적응이 된다면 새로운 것이 있더라도 선뜻 이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보조기구가 자신의 몸이 확장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회의 보수성과 개방성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을 수 있고 여기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사회적인식이 보조기구의 선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동휠체어가 우리나라에 처음 보급이 되었을 때 많은 장애인들은 그것을 이용하기 꺼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동휠체어는 아주 중증의 장애인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 그것을 이용하면 최중증장애인이되는 낙인이 있었던 것이지요. 위의 세 가지 이유가 송게족의 경우에도 적용이 되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보조기구에 대한 새로운 측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송게족에서는 부정한 아이로 규정되어 최소한의 보호만을 받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돌봄만을 받고 결국 죽게 될 운명이라고 어른들은 생각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신비감은 비단 아프리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ㅇㅎ선생님은 자신의 장애를 이유로 어렸을 때 점을 치는 것을 배워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는 삶에 있어서의 고난, 한, 업 등이 응축되어 나타난 결과로써의 장애를 상정하고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메커니즘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인류학자가 우리나라의 장애를 살펴보더라도 아프리카의 그것과의 유사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송게족에서도 음식이나 성적 금기, 조상, 신 등이 장애의 원인으로 등장하는데, 우리 나라도 이와 같은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ㅇㅎ선생님은 어릴 때 자신의 장애가 조상 중에 바람을 피운 사람이 있어 그 상대편의 한을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무속인으로부터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 내 장애는 없어지는건가요?”라고 반문하며 그 제안을 뿌리치셨다고 하네요^^;

 

  인류학적 관점 자체에 내재되어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ㅌㄱ선생님은 저자가 어떤 사회의 문화를 논하며 그것이 고유한 것, 특유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흡사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역사성 속에서 특유한 것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양식을 무리하게 다른 문화에 이식하는 것과 같은 회의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송게족의 장애와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왜 장애가 생겼는가?”라는 부분입니다. ㅅㅎ은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이 될 수 있는 부분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했습니다. 일례로 소아마비가 폴리오바이러스에서 기인하는 것이 의학적으로 밝혀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왜 나에게 장애가 생겼는가?”라는 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왜 하필 나에게”라는 물음에서는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많은 분들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운명, 고통 등으로 다가오는 장애의 무게감은 단순히 의학적인 분석만으로는, 확률적인 분석만으로는 개인에게 충분한 답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송게족 내부에서 장애는 기존의 취약한 관계를 회복하는데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령 나의 장애가 나의 어머니와 친척 아저씨와의 문제에서 발생했다면, 신부대의 부족에서 발생했다면 이를 조정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특이한 형태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장애인을 일컬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온갖 고난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 혹은 그의 가족들이 신앙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귀감을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도 장애인은 관계 회복의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분석의 단위를 사회에 두면 사회가 잘 돌아가게 하는 순기능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장애인 개인에게 둔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장애인은 장애인을 제외한 관계의 회복에 기여할 뿐 자신의 삶의 변화는 꾀할 수 없는 수동적인 위치에 처해지고 그들의 소외는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세미나 1부, 조별모임에서 나온 논의였습니다. 후반부에는 주로 장애등급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애인등급제는 상당한 논의를 거쳐야 하는 의제로 남아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지금까지의 장애운동에 있어서 시민들과 소통함에 있어서 우리의 요구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받아들여질만한 소지의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동권, 교육권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공부를 하고 싶다는 지극히 기초적이고 당연한 요구였기 때문에 반발을 살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 탈시설권리만 하더라도 장애인을 위해서는 시설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소수의 의견도 있었지만 이는 역지사지 한 마디에, 장애라는 것과 갇혀 사는 것과의 연관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쉽게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장애 등급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등급이 매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인 문제냐?, 혜택을 공정하게 나누기 위한 방편인데 이를 폐지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등의 반대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장애등급제는 다음의 몇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고 유지 될 필요가 없는 제도라는 이야기가 세미나에서 공유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몇 가지로 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로 장애등급제는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하는 장벽으로써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활동보조서비스는 이미 인정조사표라는 별도의 기준을 마련해두고 있는데, 1,2급으로 대상자를 제한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급수로 대상자를 제한하는 것은 서비스의 욕구나 필요성을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을뿐더러 형평성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장애인을 범죄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정해진 예산 내에서 장애연금등의 서비스의 대상자를 제한 하려다보니 장애인의 판정을 엄격하게 해야하는 필요성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짜장애인, 사기꾼이 필요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존의 장애판정시스템의 문제가 있고, 이를 관리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장애인의 도덕적해이로 몰아붙이는 불합리함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정체성에 등급을 매기는 차원에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준을 세워 여성을 1급, 2급, 3급으로 구분하고 1급 여성에게만 육아휴직을 준다고 해 봅시다. 아니면 흑인을 피부색에 따라서 1급, 2급, 3급으로 나누고 이를 토대로 연금을 지급한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등급을 적용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정체성 자체에 등급을 매기는 일은 상당이 이례적인 것으로 적어도 국내에서는 장애가 유일합니다. 등급을 매기는 것은 서비스 별로 있을 수는 있습니다. 노인장기요양서비스가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점수와 등급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서비스 차원의 구분이지 노인 자체에 대한 등급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네 번째로 획일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장애 등급이 같더라도 장애유형에 따라서 욕구와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급에 따른 급여와 서비스의 제공으로 인해 이 차이가 무화되는 부작용을 만들어 냅니다.

  마지막으로 등급이라는 기준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하는 서비스의 종류가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장애인관련 사회 서비스가 등급을 기준으로 전달체계가 구성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장애인연금, 활동지원인제도, 각종 요금 할인제도등이 전부입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활동지원인제도는 별도의 사정체계가 존재하고, 연금은 소득기준에 따라서 나누면 되고, 요금 할인은 폐지하면 될 것입니다.(요금할인은 소득기준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폐지하고 수당의 형태로 지급하거나 새로운 형태를 고민하는 것이 낫습니다)

 

  79일간의 농성과 그간의 투쟁을 통해서 장애등급제폐지는 이제 장애인계에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느 선까지 상상력을 가지고 폐지하느냐입니다. 1~6급까지 현재 있는 모든 급수를 폐지하느냐, 아니면 기존의 전달체계를 유지하면서 중증, 경증으로 나누냐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정부, 친정부 장애인단체에서는 후자의 정책으로 기울어 있는 듯합니다. 등급이 이분화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이 가능하기는 합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예로 들면 현재의 기준으로 3급까지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자연히 예산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등급제의 모순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차제에 등급제의 틀을 벗어날 필요는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세미나 팀 내에서 장애등급제에 대해서는 위에서 논의한 바대로 폐지를 하는 것에 대해 합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 등록제는 좀 더 고민을 해 봐야 하는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애인 등록제를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애를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통제하기 위해서, 범위를 정하고 정책을 결정하기 위한 틀로써 장애인등록제가 필요하고, 장애인의 입장에서도 등록제가 폐지되면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 혼란이 올 수 있고, 그 역사성이 부정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제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반면에 등록제 폐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장애는 하나의 현상으로써 정의될 수 있으나 장애인은 정의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장애인등록제가 필수적이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진행 될 것 같아 많이 기대가 됩니다.



ㄴㅁ

2012.11.08 17:21:46

끝에 장애인은 정의될 수 없다라는 입장과 맞물려- 나는 장애학 공부를 하면서, 장애인을 장애인이라 부르는 것이 뭔가 찝찝해졌달까. 장애가 현상이라면 장애 현상을 겪고 있을 때만 장애인이 되는 것인데, 그게 야학 공간이나 사무실 공간에서는 그 현상이 크게 나타나지 않으니까(바깥보다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가 장애인인가? 하는 생각. 또 내가 활동보조인으로 손상 있는 님과 함께 움직일 때, 손상 님이 장애를 겪으면 나도 함께 겪게 되니까, 그땐 나도 장애인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정리해온 것과 많이 달라서 많이 헷갈리고 아리까리함.;;;


시라소니

2012.11.08 23:51:27

꼼꼼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제가 제기한 문화론 부분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몇 자 보탭니다. . 

저자가 인류학의 철지난 '고유한 유기체로서의 문화' 개념으로 장애(인) 문제를 접근하면서--예를 들면, "진정한 아프리카적 [재활] 개념의 등장" (84), "관계론적 본질은 아프리카 사회우주론 일반의 특성" (101)--뒤에 가서는 송게족의 관계중심의 장애접근 방식이 서구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고 배워야 할 점이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라는 것이 제 주장이었습니다. 타문화로부터 배울 수 없다거나 배우기 어렵다는 논지가 아니었습니다. 

송게족의 문화를 존중하며 적절하게 그들의 장애문제에 접근해야한다는 취지는 물론 반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제국주의 학문이었던 인류학이 그 시절 만들어진 문화(본질)론과 그에 기초한 나이브한 문화다원론에 기댄 논의가 좀 불편했습니다. 서구인은 정작 자신들의 기독교적 전통(서구의 문화?)을 하나의 문화로 연구하지 않고 그것을 다른 문화와 동등한 비교대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은 남의 문화들(cultures)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상위척도(The Culture)'라고 상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때때로 다른 문화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거나 타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를 겸손의 제스쳐로 내보이며 자신들의 오만함을 가리기는 하지만요. 

저는 문화는 고유하고 유기적이며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고 상호참조적이며 이질적 요소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느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아마 송게족의 전통은 전통 한국은 물론 기독교 전통과도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 글에서 묻지 않은 궁금한 점은 장애에 대한 해석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치료사'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아무런 명시적 권위가 등장하지 않는데 장애 해석의 기준은 모호하고 잠정적이라 누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은 송게족의 장애관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관계중심적 문화는 얘기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권력의 문제는 놓친 것 같습니다.







ㄴㅁ

끝에 장애인은 정의될 수 없다라는 입장과 맞물려- 나는 장애학 공부를 하면서, 장애인을 장애인이라 부르는 것이 뭔가 찝찝해졌달까. 장애가 현상이라면 장애 현상을 겪고 있을 때만 장애인이 되는 것인데, 그게 야학 공간이나 사무실 공간에서는 그 현상이 크게 나타나지 않으니까(바깥보다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가 장애인인가? 하는 생각. 또 내가 활동보조인으로 손상 있는 님과 함께 움직일 때, 손상 님이 장애를 겪으면 나도 함께 겪게 되니까, 그땐 나도 장애인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정리해온 것과 많이 달라서 많이 헷갈리고 아리까리함.;;;


시라소니

2012.11.08 23:51:27

꼼꼼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제가 제기한 문화론 부분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몇 자 보탭니다. . 

저자가 인류학의 철지난 '고유한 유기체로서의 문화' 개념으로 장애(인) 문제를 접근하면서--예를 들면, "진정한 아프리카적 [재활] 개념의 등장" (84), "관계론적 본질은 아프리카 사회우주론 일반의 특성" (101)--뒤에 가서는 송게족의 관계중심의 장애접근 방식이 서구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고 배워야 할 점이 있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라는 것이 제 주장이었습니다. 타문화로부터 배울 수 없다거나 배우기 어렵다는 논지가 아니었습니다. 

송게족의 문화를 존중하며 적절하게 그들의 장애문제에 접근해야한다는 취지는 물론 반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제국주의 학문이었던 인류학이 그 시절 만들어진 문화(본질)론과 그에 기초한 나이브한 문화다원론에 기댄 논의가 좀 불편했습니다. 서구인은 정작 자신들의 기독교적 전통(서구의 문화?)을 하나의 문화로 연구하지 않고 그것을 다른 문화와 동등한 비교대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은 남의 문화들(cultures)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상위척도(The Culture)'라고 상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때때로 다른 문화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거나 타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를 겸손의 제스쳐로 내보이며 자신들의 오만함을 가리기는 하지만요. 

저는 문화는 고유하고 유기적이며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고 상호참조적이며 이질적 요소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느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아마 송게족의 전통은 전통 한국은 물론 기독교 전통과도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 글에서 묻지 않은 궁금한 점은 장애에 대한 해석의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치료사'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아무런 명시적 권위가 등장하지 않는데 장애 해석의 기준은 모호하고 잠정적이라 누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은 송게족의 장애관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관계중심적 문화는 얘기했지만 그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권력의 문제는 놓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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