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세미나 마지막 발제문

by 손오공 posted Aug 1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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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17:20:45

현장인문학/ 장애학 / 마지막 시간/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자아에의 배려 / by 박정수

지난 시간에 우리는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들어온 이 자기결정권이란 개념은 분명 장애인의 자립생활에 핵심적인 권리이지만 자립의 조건으로 설정될 때 그 개념은 강제수용과 같은 권리박탈의 근거로 기능한다. 자기결정권은 ‘자유’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법률적 권리 개념으로 구체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 구체화 과정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자기결정권 내지 자기결정 능력을 자유라는 개념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 재검토 해 보자. 지난 번 타테와 신야의 글에서도 흥미롭게 제기된 것은 자기결정권은 (법률적, 정신의학적, 사회학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있다 없다는 문제) 좋은 삶을 위해 일상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장시켜야 할 능력이라는 점이다.


이번 시간에 볼 미셀 푸코의 자유 개념도 비슷하다. 흔히 자유를 구속과 대비시켜 구속이나 억압에서 해방된 상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발하는 상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초월적인 상태로 정의한다. 하지만 푸코는 자유를 이렇게 어떤 ‘상태’ 내지 ‘조건’으로 정의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와 권력의 배치 하에서(중세 기독교의 사목권력과 근대의 인간주의적 권력장치들) 생긴 것으로, 자유의 개념사 안에는 이와는 다른 역사가 있음을 찾아낸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철학의 중심에 자기 삶에 대한 자기 지배력을 신장시키는 실천으로서, 즉 자유를 확장시키는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돌봄, 통치)의 실천이 놓여있음을 밝혀낸다. 자유를 법과 형이상학, 혹은 (인간, 사회)과학의 장이 아니라 윤리적 실천의 장 속에서 파악한 역사를 되찾자는 게 푸코의 주장일 텐데, 대담자의 거듭된 의문처럼 자유의 실천이란 곧 (정치적) 해방운동이 아나겠는가, 윤리의 차원에서 자유의 실천이란 너무 개인적이거나 모호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푸코 역시 해방운동을 자유의 실천을 위한 조건의 창출로서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으며 그와는 다른 자유의 실천이 분명히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양식(에토스)을 형성하는 그 윤리적 자유의 실천을 간과할 때 예속의 끈은 곧바로 우리의 손발과 영혼을 사로잡게 된다고 말한다.


흔히 윤리(ethics) 하면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되지만 푸코가 본 그리스 철학에서 윤리란 자기에 대한 배려, 자기의 품행과 처신방식, 즉 존재양식에 대한 배려이며 그런 윤리적 실천을 통해 타자에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양식에 대한 지배력을 신장시키는 실천이 곧 자유의 실천이다. 자신의 존재양식에 대한 자기 결정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그것이 푸코가 생각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자기결정(권)을 확대하는 실천이 윤리적 실천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기결정권(혹은 자유)을 권리 다툼의 법적 차원에서만 파악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와 오류를 개선할 여지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기 결정권을 요구함에 있어서 정부나 시설장이나 일상생활에서의 타인(가령, 활보노동자)에게, 그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요구는 자신이 윤리적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결정권을 법적 권리로서 요구하는 것과 어떻게 다르며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자기에의 배려를 자꾸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으로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푸코는 그리스인들의 자기배려는 반드시 스승과 친구를 필요로 하며 ‘에로스’나 ‘필리아’란 바로 그런 자기 배려의 상호적 관계 안에서 생기는 정서임을 역설합니다. 동거인들과, 활보노동자와, 활동가와 우정 내지 사랑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자기배려의 실천, 자유의 실천, 자기결정권의 실천에 필수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보자.


자기에의 배려가 타인에 대한 권력남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대해 푸코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흥미로운 얘기를 한다. 스토아 학파에서 극단화된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가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타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결국은 자기도 잘 못 돌보게 되는 것)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담자는 거꾸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유한성을 인정하는 것,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타자에의 권력남용을 막지 않는가 라고 되묻는다. 타자를 나의 한계 지점에, 구타 유발자로, 죽음의 유발자로 보는 태도이다. 여기선 타자와의 에로스적 관계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신 스토아학파가 권유하듯이 타자에의 권력남용을 유발하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늙음으로 달려가는 것, 죽음을 두려워 않는 것, 가난과 시련을 두려워 않는 것, 질병을 두려워 않는 것, 신체적 손상을 두려워 않는 것, 우리가 자신의 장애를 긍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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