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삐빅삐비빅삐빅비비빅삐비빅삑.
이번 웹진 삐빅의 주제는 작성자의 노들에서의 개인적인 기억들과 찡찡거리는 말들 같은 것입니다.
※ 노잼과 오글거림을 주의해주세요.※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멀리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조동진 - 작은배>
나는 2015년 1월 노들야학의 상근직을 정리하고 나왔다.
글을 써야하는데 우연히 들은 저 노래의 작은 배가 서글퍼 보여 습관처럼 자기연민을 하는데 이용하기로 한다.
나의 배는 저 노래의 배처럼 작은 배였나 보다, 라고. 함께 가야했지만 나의 배는 이렇게 작구나.
그리고 도망쳐 나와 들어간 회사에도 좋은 사람은 있었지만
‘보다 나은 대안적 세상’을 고민한다거나
‘가치로 남는 다는 것은 인생을 걸어볼만한 일입니다’ 라는 말을 해준다거나
‘노들과 함께 세상을 바꿉시다’ 라는 제안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노들장애인 야학 홈페이지 - 노들야학 소개글)
나는 정말 저런 말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았지만,
삶이 노들과 멀어진 지금, 어느 날엔가 인권, 가치와 같은 말들이 너무 멀어져 보이지도 않게 되는 날이 올까 두렵다.
어쩌면 지금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안정된 직장, 연봉, 가정. 이런 것들은 반대편에 있는 가치일까.
반대편은 아닐지라도 가치의 우선순위를 저쪽에 준다면 내 삶의 많은 것이 달라 질 거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내가 가질 수 있을까.
갈팡질팡하다 아무것도 못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상근을 정리하고 교사 활동만 한지 4년 동안 나는 무엇이 변했을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내 모습에 또 가끔 마음이 무거워진다.
여전히 우울하고 말도 잘 못하고 많이 외로워한다.
2009년 1월에 내가 본 노들야학 천막야학. 눈 쌓인 마로니에 공원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천막과 사람들. 호랑이이인지 사냥꾼인지 무슨 옷을 입었던 우준이랑 ,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빨간 다라이를 옮기던 사랑이, 낮에는 깨끗하고 파란 하늘, 밤에는 천막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소음들이 사랑스러웠다.
2008년 1월 눈오는날의 천막야학. 눈오는날, 오모가리 김치찌개를 먹는날이 좋았다. 회의할때 교장샘이랑 동엽이형의 대화를 듣고 놀랬던 처음 기억.
난로만 잘 키고 자면 꽤 따듯했지만 술을 먹고 놀고 싶어 했던 우준이형은 덮고 잘게 없어 밤새 추위에 떨며 자기도 했다.
밤에 야간지킴이를 할때는 라꾸라꾸 침대를 이용. 낮 교대자와 교대하고 집에 갔다. 학교 개강날 아침교대자를 기다리다 첫수업에 늦어 교수놈한테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부들부들..
우준이형은 체격이 크고 무겁다. 휠체어도 형의 몸에 맞는 큰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활동지원사 제도가 사실상 없었던 저 당시에 교사들은 술을 좋아하는 우중이형이 술자리에 끼면 식사며 화장실이며 모든 활동지원을 해야했다. 나의 생일날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갔는데 나와 (시간이 늦어 집에 갈 방법이 없는)우준이형만 남아 둘이 대학로 거리를 다녔다. 이날 우준이형은 술에 취해 휠체어로 내 발등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치고 다녀 나는 계속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녀야 했다. 내 생일날!
천막야학의 수업시간. 천막야학의 수업시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노력해서 참관을 많이 했어야 했다. 사진의 수업교사는 승화누나, 야학 수업 복귀 했으면 좋겠다.
천막야학이 한창이던 어느 날 낮, 나는 사랑이랑 마로니에 공원에서 혜화사거리 쪽으로 걸었다. 뭘 같이 사러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별로 안 친해서 서먹하게 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공원에 모여 있는 비둘기를 보고 사랑이 얘기해줬다.
“형, 비둘기가 어디서 온줄 알아? 지중해에서 왔다고! 지중해 창공을 날던 애들이랑 말이야”
아.. 그렇구나. 몰랐어 라고 그냥 흘러가는 대화였던 이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이때쯤 나는 학교에서 학생회 선거를 준비했었고 장애인운동 학회도 만들어 보려 했는데 두 가지 일 모두 아주 망했다. 폭망... 잘 되지 않았다. 부모님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연락도 하지 않았고 활동보조 알바를 하며 돈을 빌려 생활했다. 힘든 시기에 천막야학에 온 거라 그랬는지 의지가 되고 사람들이 좋았다.
지금은 꽃동네에 가 있는 선동이형 이야기를 들은 것도 이때쯤이고 (연락이 안되더라, 만취해서 경찰서에서 발견되었다더라는 얘기를 듣곤 했다), 곧 기일이 다가오는 호식이형이랑 술을 처음 먹은 것도 아마 천막야학이었겠지.
태일이형을 처음 봤을 때는 야학 교사인줄 알고 인사를 했었다. 명학이형, 우준이형, 미은누나, 덕민이형, 그러고 보니 학생들은 술을 참 좋아하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천막야학 하면 먼저 생각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사람들이다.
사진 아래의 활짝 웃는 태일이형. 태일이형을 처음 봤을때 교사회의 뒷풀이에 너무 자연스레 앉아 계셔서 교사인줄 알았다. 그날 2차까지 가셨나~?
어느 날은 호식이형이랑 술을 먹다 둘이 집에 가는 길에 형이 너무 좋아서 내가 팔을 깨물어버렸다. 그 뒤로 술자리에 가면 호식이형은 자주 “이자식이 술 마시고 내 팔을 깨물었어” 이야기 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어느 신임교사님의 침묵, 잠시 흔들린 눈동자, 자리 바꿔 달라는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너무 당혹스러워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변명할수록 더 이상한 놈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어떤 술자리가 있었다.
2012년 7월 양양 기사문 해수욕장에서의 김호식형. 이날 술자리에서 호식이형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극의 주인공처럼 간지나는 독백을 시작하였으나 술취한 박준호의 방해로 독백은 끝을 맺지 못한다...미안합니다 호식이형
나는 낙하산 교사였다. 교육부장 유리의 신임교사 세미나에는 참석했지만 참관수업도 이수하지 않았다. 교사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부산 장애인참배움터 야학에서 교사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두 달 만에 수업을 맡게 되었다. 수업 시간표를 정하는 교사수련회에서 인준에 반대하는 좌동엽 교사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인준을 받고 수업을 하게 된 것이다. 내심 나는 잘 할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이날 은전누나는 수련회 자료집에 “꿈같은 서른이 되었습니다” 라고 썼던 것 같다. 서른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유미누나는 내 옆에 앉아 있었는데 신행이형이랑 나랑 같이 교사 인준을 받을지 말지 회의 때 사람들이 우리를 두고 막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학기가 시작하고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개학을 하고 첫 수업을 진행했는데 너무 너무 못했다. 나의 첫 수업은 청솔1반 과학과 한소리반 사회(한소리반 과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의 이름도, 특성도 잘 몰랐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 야학에서 수업을 하는것도 너무 어려웠다. 청솔1반 과학시간에는 처음 보는 초등학교 과학 교과서를 들고 “바람이 불면 돛단배가 움직입니다” 라고 말해 놓고선 어떤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낯 뜨겁게 서있던 기억이 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