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종합선물세트 같은 글

by 손오공 posted Jul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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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03:27:36


물뉴미

만세가 세미나 때 이것저것 얘기했던 것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묶여 있는 글.?

<위클리 수유너머>에 실린 걸 퍼 옴. ?

글쓴이 만세!


(줄 바꿀 때마다 저절로 생기는 물고기~ 재밌다)



http://v.daum.net/link/8119994

여기 가서 봐도 됨



물물



푸코와 문제화의 정치

1. 도발

“이론 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성은 어떤 경우에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성폭행(rape)을 처벌한다면, 그것은 물리적 폭력을 처벌하는 것이지 그것 이외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원리적으로 말해, 주먹을 다른 사람의 얼굴에 박아 넣는 것이나, 성기를 다른 이의 성기에 박아 넣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

성폭행이 물리적 폭력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적잖이 당혹스러운 이 말은, 보수꼴통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성(sexuality)이라는 범주에 깊은 통찰력을 가졌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이 문제적 발언의 주인공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성폭행에 관한 법안을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을 좀 더 중요한 법적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성 범죄를 여타 범죄와 다른 논리로 다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푸코는 이런 일련의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푸코의 반응은 그에게 호의적인 이들조차 당황하도록 만들었다. 소위 ‘좌파적 상식’에 비추어 봐도, ‘성’을 특별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푸코는 대체 왜 그랬을까? 푸코가 심각한 마초였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가 성에 대해 가졌던 독특한 입장이 이런 반응을 낳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성은 역사적인 범주이다. 성을 ‘특별한’ 대상으로, 법적으로 따로 취급할 만큼 ‘소중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근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권력을 작동시킨다.

알다시피 근대 사회에서 성은 누군가의 본질을 드러내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식습관을 근거로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을 판단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누군가가 평범하지 않은 성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가 정상적인 주체인지 의심한다. 거꾸로 누군가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 사람의 성 생활에 심각한 왜곡이 있을 거라 추측한다.(ex. 저런 인간은 분명 밤에 변태적 행위를 일삼을 거야!) 이처럼 성은 한 사람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은밀하면서도 궁극적인 무언가다.

푸코에게 이는 역사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성은 다른 것에 비해 특별히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성을 둘러싼 규약이나 제언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식사나 수면 등 삶의 전반을 관리하는 양생술의 일부일 뿐이었다. 성이 특별한 영역으로 부상한 것은 근대의 독특한 사회적 실천 덕분이었다. 기독교의 고해성사, 그러니까 성과 관련된 실천을 행위만이 아니라 의식과 욕망의 흐름까지 추적해 정기적으로 신부에게 털어놓는 ‘고백’이라는 실천의 일반화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성은 인생에서 뭔가 중요하고 본질적인 영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단순히 주목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만큼, 성에서 바람직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도착적 성의 종류(즉 여러 가지 변태들)를 세세하게 분류한 정신의학의 등장은 이것의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다.

이런 변화는 성을 둘러싼 실천은 물론, 일상 전반에 대한 감시와 통제마저 가능하게 만들었다. 성이 중요한 영역으로 부상하면 할수록 자신의 성 생활을 돌아보고 그것을 검열하거나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사람들은 ‘적절한 성행위’나 ‘정상적 욕망’이라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답안지에 자신과 타인을 끼워 맞추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자위를 못하게 한다며 아이를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성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온 동네에 CCTV를 설치하는 국가의 모습은, 이것이 단지 성적 실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성이라는 영역을 축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통제의 시도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여겨지면 여겨질수록, 성을 통한 통제 역시 강화되는 셈.

푸코의 시각에서, 법적으로 성은 특별한 영역이라고 인정하는 일은 이처럼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을 공인하고 확정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성폭행이 일반적 폭행과 무엇이 다르냐는 푸코의 질문은, 아마도 성이라는 범주자체의 역사성과 그것이 가지는 통제효과를 지적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려는 국가적 시도를 고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2. 들쑤심, 혹은 문제화의 정치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다고 푸코가 이런 법안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역시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푸코의 입론에 비추어 봐도, 성폭력을 일반적인 폭행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푸코의 말은 성이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실천에 근거하는 만큼 성은 분명한 실제적 효력을 가진다. 근대인에게 성은 실제로 중요하다. 성폭행은 일반적 폭행보다 분명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법을 철회하는 것은 피해를 방기하는 무책임한 처사다.


결론적으로, 문제적 상황에 답은 제시하지 않은 채 상황만 들쑤셔 놓은 꼴이다. 하지만 이런 들쑤심은 어설픈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낳았다. 사람들에게 사유를 강제하는 효과가 그것이다. 푸코의 이런 들쑤심 덕분에 사람들은 중립적이라 생각했던 자신들의 합리성이나 지식을 통해 권력이 작동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현실정치가 제시하는 선택지, 예를 들어 방치할 것이냐 법적으로 보호할 것이냐 같은 양자택일적 답안지를 넘어 스스로 사유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성폭행과 관련한 토론회가 열렸고, 사람들이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답 없는 들쑤심이 사람들을 ‘상식’에 기초한 판단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셈이다.

사실 푸코의 작업 전체가 이런 ‘들쑤심’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푸코는 말년에 자신의 작업을 요약하며, 자신의 방법이 “보편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suppose universal do not exist)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푸코는 사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이성’, ‘비행’, ‘성’과 같은 보편적 범주들을 의심한다. 그리고 어떤 역사적 실천과 관계가 그것을 만들어내었는지 탐구한다. ‘광인의 감금’(이성 형성)이나 ‘범법자의 구금’(비행 형성) 혹은 ‘성적 실천의 고백’(성 형성)이라는 실천의 발견은 그 탐구의 결과였다.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형성된 범주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특정한 권력 현상의 핵심적 축임을 밝혀낸다. 예를 들어 푸코에게 이성이라는 범주는 사회가 그 성원들이 특정한 형태의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자는 이성의 능력이 없는 ‘환자’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감금된다. 비행이라는 범주는 생활습관이나 태도가 범죄성을 형성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것들을 형벌과 교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학교처럼 감옥 이외의 공간에서조차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정당하게 규제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범죄성과 연결된다고 여기게 하는 ‘비행자’라는 범주 덕분이다.

성폭행 관련 법안에서 그랬듯이, 푸코는 어떤 저작에서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문제라 여기지 않은 곳에서 문제를 찾아내는 푸코의 물음은, 사람들이 기존의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 물음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개인이 18세기 감옥이나 수도원에서 효율적 통제를 위해 도입된 역사적 단위라는 푸코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장이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주제를 넘어, 개인을 극복하는 단위의 창출(ex. 코뮨)이나 개인의 권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문제(ex. 사회권, 결사권)를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푸코가 섣부른 방향 제시를 삼가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문제제기’에 한정한 것은, 바로 이런 ‘능동적 사유의 촉발’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푸코에게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문제화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푸코는 답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 지금의 구도를 뒤흔드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거나 자명한 앎이기에 권력과 상관없다고 여긴 장소에서 반드시 대면해야 할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찾아낸다. 정치라 여기지 못한 것에서 정치를 발견하는 것. 이를 사유함으로서 지금의 정치를 뛰어넘는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 각자의 입장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를 길러내는 것. 아마 이것이 수많은 영역을 가로지르며 푸코가 실천하려 했던 ‘문제화의 정치’일 것이다.

3. 주권과 미시권력

이런 ‘문제화’ 혹은 ‘문제화의 정치’가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특정한 대안 없이 문제제기를 일삼는 것에 불과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푸코가 말한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틀을 깨고 다른 형태의 정치가 시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가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선 정국에서 누군가가 선거가 가지는 한계나 학문이 가지는 효과를 지적하는 ‘문제화’를 실천한다면, 그는 지엽적인 문제에 치중함으로써 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비판받을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정치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영역이나 다른 곳보다 권력이 보다 더 집중된 장소를 떠올리는 것은 권력에 대한 잘못된 가정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푸코가 전통적 권력이론인 ‘주권이론’을 비판하고 자신의 ‘미시권력’이론을 정립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통상 우리는 주권이라는 가정에 따라 권력이 발휘되는 ‘중심’을 가정한다. 그 중심은 주체일 수도 있고, 자리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병원에서는 의사가 권력의 중심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쉽게 이런 ‘권력자’나 ‘권력의 지위’로부터 권능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나 의사가 지배자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푸코가 보기에 지배자의 권한은 지배자가 피지배자와 맺는 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다.” 예컨대 병원에서 의사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환자와의 관계 덕분이다. 즉 환자들이 스스로 의사의 말을 ‘진리’로 여기고 따르기 때문에 의사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관계는 의사와 환자가 공유하고 있는 ‘의학담론’, 그러니까 병에는 특정한 원인이 존재하고 특정한 자격과 도구를 갖춘 이가 이를 식별할 수 있다는 특정한 앎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즉 지배자가 행사하는 권한은 그가 권력을 ‘가졌기’ 때문도, 특정한 지위가 신비하게 그것을 발동시키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맺는 관계가, 그것을 일정한 형태로 유도하는 앎이나 기술이 이런 권력 현상을 발생시킨다.

미시권력은 바로 이처럼 권력이 발생하는 관계를, 피지배자뿐만 아니라 지배자의 사유와 행동양식까지 규정하는 특정한 합리성이나 기술을 세밀하게 살피는 태도를 의미한다. 오해하지 말길. 이는 ‘주권자’로 불리는 이들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당장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이라는 자연파괴를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권력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이라고 가정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대통령과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개발지상주의’와 같은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에 주목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이 가능한 것은, 대통령과 시민들을 관통하는 이런 합리성이 그 사업을 ‘삽질’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길’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권한자라 해도 이런 합리성 위에서 움직이지, 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즉 푸코의 ‘문제화’는 사소한 영역에 대한 지엽적인 문제제기가 아니다. 반대로 권력이 작동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을 다루며, 그렇기에 오히려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푸코의 문제화가, 미시권력론에 따르면 권력현상에 아주 핵심적인 영역(ex. 역사적 합리성, 상식, 기술)을 정치의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다루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제화의 정치’는 정치를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것으로, 우리가 직접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정치가 특정한 권력 현상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그리고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합리성과 앎이 권력을 만들어낸다면,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권력에 개입할 수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주권이론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라는 권력현상에 접근하면, 그것을 불러온 것은 월스트리트에 모여 있는 다국적 기업과 은행이다. 그들의 막강한 초국적 권한이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하지만 이 경우 다국적 기업이라는 주권자가 내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진 채 내가 닿을 수 없는 너무나 먼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미시권력론에 근거한 ‘문제화의 정치’라면 차라리 여기서 ‘자기계발’ 같은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길러내는 기술에 주목할 것이다.


초국적 기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계발’ 같은 기술과 담론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유휴자금을 여기 저기 투자하는 주체가 있어야만, 초국적 투자 업체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문제화의 정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라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자기계발’처럼 바로 내 옆에서 작동하는 담론과 기술을 변형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권력이 주권자의 권한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실천은 생각보다 큰 효과를 낳을 것이다.

4. 능동적 윤리를 위하여

주권과 같은 투박한 정치적 구도를 벗어나는 것.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만 이제껏 간과된 여러 영역을 문제화하는 것. 이것들을 통해 작동하는 미세한 권력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이를 바꾸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이를 위해 저 멀리 있는 권력자가 아닌, 내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관계와 합리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마 이것들이 푸코가 ‘문제화의 정치’를 통해 일으키고자 한 효과일 것이다.

평생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던 푸코가 마지막으로 ‘문제화’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윤리’였다. 그는 사람이 어떤 윤리를 가지느냐에 따라, 즉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규제하느냐에 따라 특정한 권력이 행사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근대의 성 윤리는 특정한 행위의 형태를 기준으로 정상/비정상의 도식을(정상적 체위/변태적 체위) 설정하고, 그것을 초월적 규칙으로 선포함으로써 작동한다. 이 윤리를 내면화한 주체는 알아서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푸코는 현대사회의 권력이 사람을 억압하는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길러낸다고 지적한다. 푸코의 권력을 ‘생명권력’이라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적 ‘윤리’는 이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하지만 푸코는 이런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는 윤리의 가능성 역시 모색한다. 그가 말년에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 윤리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의 윤리는 정상/비정상 도식 대신 절제/과다의 도식을 기준으로 작동했다. 고대인들 역시 성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부간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성행위가 악이라거나, 혼외정사가 비정상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무분별한 성행위를 삼갔던 것은 쾌락에 휩싸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부부가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상대를 서로의 자제력을 훈련하는 훈련 파트너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꾸로 쾌락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활용하여 삶의 기쁨을 늘릴 수 있다면, 통상적 금지를 넘어 성행위를 하는 것도, 혼외 성 관계를 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허용되었다. 즉 이들의 윤리는 주체가 초월적 법칙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주체에게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푸코는 이를 ‘자기배려의 윤리’라고 부른다. 사회에서 주어지는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을 능동적으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윤리를 함양한 주체는 오늘날 작동하고 있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질적으로 다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 역시 명령을 수동적으로 듣는 존재가 아니다. 대신 능동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을 관리한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돌보고 배려해야 할지에 대해서, 즉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와 지인들의 닦달에(목표를 가져라! 꿈을 가져라!) 적당히 남들이 가지는 목표(ex. 10억 벌기)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경주한다. 하지만 고대의 자기배려는 그 목표를 철저히 성찰하면서 시작된다. 자기배려에서 배려의 대상은 재산도 권력도 명예도 아닌 ‘영혼’이라는 당대의 가르침은 이런 성찰을 잘 보여준다. 자기배려를 앞장서 실천했던 디오게네스가 종종 광장에 나가 자위를 했던 것은, 자기배려를 위해 불필요한 명예나 허례허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푸코는 어떻게 해야 이런 윤리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사회는 지도자의 좋은 프로그램에 의해 달성되지 않는다. 이런 윤리는 지도자의 프로그램에 따르는 ‘신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꾸로 모든 성원들이 자신의 삶의 지도자가 될 때, 그럼으로써 능동적 주체로 변할 때에 비로소 이런 윤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변혁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원이 자신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사유하여 나름의 계획을 제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푸코가 제시하는 그리스/로마의 사례는, 이를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사례일 뿐이다.

‘문제화’ 혹은 ‘문제화의 정치’는 아마도 푸코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한 ‘능동적 윤리’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정치의 구도에서 벗어나 간과된 삶의 영역을 ‘문제화’하는 ‘문제화의 정치’는, 결국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능동적 자세이자 이를 위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던져준 답안지로 서로를 채점하지 않는 것. 주어진 문제를 풀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제시하는 것. 내 사유의 틀은 물론이고 친구의 사유의 전제마저 들쑤시는 것. 이를 통해 내 삶을 좌우하는 권력을 파악하고 이를 변형시키는 것.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 이제 푸코의 눈을 빌어, 푸코보다 멀리 나아갈 때다.

-만세(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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