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발의 장애학 연구노트-11]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장애인 단종수술과 안락사
나치는 정권을 잡은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3년 7월 14일 「유전적 결함을 지닌 자손의 예방을 위한 법률(Law for the Prevention of Genetically Defective Progeny)」을 시행에 옮겼습니다. 그 법률은 “유전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갖게 될 어떤 아이가 상당히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지닐 가능성이 매우 높음이 과학적인 의료적 경험에 의해 입증된 경우라면, 그와 같은 모든 사람은 외과적 수술에 의해 자식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지요. 이 법에 의해 독일에서는 1939년 9월 1일까지 약 375,000명에게 단종수술이 시행되었습니다.
아래의 목록은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기준들이고 괄호 안의 수치는 1934년에 이러한 기준들 아래서 단종수술이 이루어진 비율인데, 그 다수는 ‘선천성 정신박약’으로 표기되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단종수술 중 24.1%는 본인이 아닌 법적 후견인에 의해서만 동의가 이루어졌고 38.6%는 강제로 수술이 이루어졌는데, 나치 체제하에서 단종수술을 받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5%에 달했다고 합니다.
1. 선천성 정신박약 (52.9%) |
또한 1935년 9월 공표된 「뉘른베르크법령(Nuremberg Laws)」3)의 일부인 「혼인보건법(Marriage Health Law)」은 배우자들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유전성 질환, 정신착란, 혹은 결핵이나 성병과 같은 전염성 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에는 아예 결혼을 금지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가 이미 단종수술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장애인이 태어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는 우생학적 조치들을 실시했던 나치 독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안락사라는 이름 아래 장애인에 대한 집단학살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장애성인에 대한 안락사 프로그램은 1939년 9월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를 담당했던 비밀 조직이 베를린 시내의 동물원로(Tiergartenstrasse) 4번가에 위치해 있던 유대인에게서 몰수한 한 저택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에 T-4라는 암호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공식적인 법률이나 정부 차원의 명령이 아니라 히틀러의 개인적인 명령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주치의였던 칼 브란트(Karl Brandt)가 총통비서실장 필립 불러(Philipp Bouhler)와 더불어 총 책임을 맡았습니다.
T-4 프로그램의 주요 대상은 정신박약, 정신분열증, 우울증, 왜소증, 마비, 간질과 같은 이상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며 생산성의 정도가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안락사 조치는 그 시점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맞물려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고갈의 막는다는 경제적 동기가 그 기저에 깔려 있었지요. T-4 조직에 고용되어 있던 한 통계전문가는 나치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70,273회의 ‘살균’이 독일제국의 예산 855,439,980마르크를 절감해 주었으며, 독일 전체에서 12,492,440kg의 고기와 소시지의 낭비를 막아주었다는 통계를 산출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안락사를 시킬 대상이 선정되면 게크라트(GeKraT)―Gemeinnützige Krankentransport GmbH의 약자로 ‘환자수송 자선회사’라는 의미임―라고 불렸던 수송 조직이 회색의 버스와 밴을 이용해 사람들을 그라페네크(Grafeneck),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베른부르크(Bernburg), 하다마르(Hadamar), 하트하임(Hartheim), 존넨슈타인(Sonnenstein)에 위치한 6개의 안락사센터로 날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서 일산화탄소 가스를 마시고 죽어갔습니다. T-4 프로그램에서 장애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고안된 이러한 가스실은 이후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에서도 똑같이 사용이 되었지요.
피해자 가족과 안락사센터가 위치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1941년 8월 그 프로그램이 종료되기까지 최소한 7만 명의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T-4 프로그램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이후에도 임의적인 형태의 안락사는 독일 전역과 점령지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T-4 프로그램이 개시되기 이전부터 장애아동들에 대한 안락사는 ‘특수아동병동’으로 위장된 전국 28곳의 살인센터에서 치사주사, 약물 과다 투여, 아사 등의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으며, 이러한 장애아동의 안락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제출된 레오 알렉산더(Leo Alexander)의 연구에 따르면 나치 체제하에서 살해된 장애인의 수는 27만 5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장애 한 가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1939년에 독일에는 30만 명의 정신장애인이 있었지만 1946년에 그 수는 단 4만 명에 불과했으니까요.
이렇듯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장애인에 대한 살해와 단종수술이 이루어졌지만 종전 후 이러한 문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범재판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학살과 단종수술은 은폐되거나 단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시작으로서만 설명되었으며, 누구도 이를 이유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단종수술을 받은 이들이나 살해된 장애인의 상속인에게는 어떠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집단학살 정책이 초래한 막대한 폐해가 장애인들이 맞이했던 마찬가지의 비극적 운명을 가려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의 주체였던 연합국의 주요 국가들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우생학적 차별과 범죄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조금 달리 평가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부터 범죄자들이 범죄자를 제대로 심판하고 처벌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요.
각주1) 얼굴․손․발․혀 등의 근육에서 불수의적(不隨意的) 운동장애가 나타나는 증후군을 무도병(舞蹈病)이라고 하는데, 헌팅턴병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되거나 4번 염색체 이상에 의해 뇌의 신경세포가 퇴화하여 발생하는 무도병의 일종이다. 치매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발병 후 15∼20년 이내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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