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나는 박현이다. 1983년에 태어나 2016년 12월22일에 죽었다. 나는 지금 광화문 광장 지하,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에 있다. 그곳 빈소에 줄지어 있는 열두 개의 영정 중 머리에 초록색 물을 들인 남자, 그게 바로 나다. 그날, 독감이 폐렴으로 진행되었다고 의사가 입원을 권했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만 견디면 좋아질 거라 생각했다. 참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삶을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에게 고통은 익숙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가 고작 감기 따위로 죽는 것은.
“친구들 있는 곳에 가자.” 열세 살의 어느 날, 엄마가 나를 데려간 곳은 꽃동네였다. 가는 길에 엄마가 말했다. “나를 ‘이모’라고 불러야 한다.” 엄마는 왜인지 꽃동네 입구에서 들어가지를 않고, 함께 간 동네 아주머니가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가 금방 데리러 올 줄 알았다. 무섭고 서러운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이 지나 ‘면회’를 온 ‘이모’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포기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나만 없어지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이 넘었을 때 ‘자립생활’이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장애인도 사회적 지원을 받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 왜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나. 나는 음성군청에 찾아가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 말하고, 나에 대한 사회복지서비스를 변경해 달라 요청했다. 그것은 법에 명시된 나의 권리였다. 군청은 이를 거부했다. 나는 인권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시설이 발칵 뒤집혔고 엄마가 달려와 소송을 취하한다는 문서에 내 지장을 강제로 찍었다. 소송은 끝내 패소했다. 나는 시설에 그저 버려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결박당해 있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그곳을 벗어나는 데 3년이 더 걸렸다.
2011년 1월, 서울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전입신고를 마친 후 종이 위에 쓰인 나의 주소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것은 나와 이 사회를 연결하는 탯줄 같았다. 그것 하나 얻기가 그토록 어려웠다. 행복했으나 두려웠다. 집과 시설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는 태아처럼 무력했다. 턱없이 부족한 생계비와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 나에게 하루 24시간은 한없이 길었다. 그 막막한 시간을 건너올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동료들의 덕이었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주었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함께 손잡고 싸워주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 비로소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탈시설 장애인들의 모임인 우리들의 이름은 ‘벗바리’. 누구도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장애인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병든 노인들을 버려서가 아닌가.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자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었다. 속도를 낮추고 상처를 돌보았어야 한다. 상처 난 곳으로 온갖 악한 것들이 꿀처럼 스며드는 법이다. 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다. 가장 아픈 곳으로부터 연결된 근육들의 연쇄적인 강화만이 우리를 함께 강하게 만들 것이다. 생명을 포기하는 곳, 연대가 끊어지는 그 모든 곳이 시설이다. 그러니 모두들, 탈시설에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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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7050.html#csidxc413bc2d2d09248be8ec8f9e2c5882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