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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 후원자의 무례

by 뉴미 posted Dec 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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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묵묵]후원자의 무례

 

동정하는 자가 동정받는 자의 무례에 분노할 때가 있다. 기껏 마음을 내어 돈과 선물을 보냈더니 그걸 받는 쪽에서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돈이랑 선물은 매번 챙겨가면서도 감사의 표시가 없다면, 주는 쪽에서는 꽤나 서운할 것이고 그 서운함은 언젠가 분노로 돌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매년 이맘때쯤 많은 시설들에서는 후원자들의 방문일에 맞춰 대청소를 하고 며칠간 공연을 준비하고, 후원자들을 향해 활짝 웃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감사의 편지도 쓴다. 그것은 후원자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가질지도 모를 서운함과 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은망덕한 이들에 대한 자선가의 분노에는 따져볼 것이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자선가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서도 왜 분노하는가. 그가 원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보상이었던가. 

철학자 니체는 선행을 통해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자들의 책략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선행을 베풀고 헌신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선행과 헌신으로 상대방에 대한 소유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에 따르면 이들의 소유욕은 선행을 구상할 때부터 발휘된다. 이를테면 자선가는 도움을 줄 대상을 먼저 상상한다. 그는 스스로를 그 사람의 위치에 놓아본다. 불쌍한 처지의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는 고마움에 눈물까지 흘릴 것 같다. 이런 상상을 마친 그는 가난한 이에게 선행을 베푼다.

그의 상상대로라면 상대방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야 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선행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과 알아서 하는 대견한 행동. 이런 게 연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구현되지 않을 때 우리의 자선가는 끔찍한 배우를 만난 감독처럼 분노한다.

자선가의 분노는 그의 선행이 소유물에 대한 욕구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이미 구상에서부터 “소유물을 다루듯 가난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취급”했다. 상대방이 자기가 원하는 행동을 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에 입각한 선행은 그 자체로 상대방을 사물화한다. 인형놀이와 같다. 멋진 옷을 입혀주고 머리도 예쁘게 땋아주었지만 내가 원한 자리에 내가 원한 포즈로 있기를 바라는 그런 인형 말이다.

우리는 사랑과 헌신으로 상대방의 품행에 대한 명령권을 얻었다고 믿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연인 사이에서도 그렇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권력자와 신민 사이에서도 그렇다.

대표적인 예는 부모와 자식일 것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소유격으로 표현하곤 한다. 부모에게 자식은 모두 ‘내 자식’이다. 그리고 자식이 기대를 저버릴 때 부모들은 곧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말한다. 감정적으로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는 ‘나는 헌신함으로써 너를 소유했는데’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선가, 박애주의자, 헌신하는 자가 느끼는 배신감에는 큰 무례함이 들어있다. 그는 미장센을 망친 상대방에 분노했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방을 미장센의 소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마치 상대방의 품행에 대한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는 듯 말이다. 말하자면 그는 상대방을 사물, 인형, 소유물로 다룬 것이다. 

최근 ‘롱패딩 후원’ 문제 때문에 인터넷에 글을 올린 어느 후원자의 분노에서도 그런 걸 일부 느꼈다. 나는 그 후원자가 마음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절세나 이미지 세탁을 위해 어쩌다 한 번씩 선행을 연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복지재단을 통해 매달 5만원씩 가난한 아이를 꾸준히 후원해왔고,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별도의 선물을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문제의 ‘롱패딩’도 애초에는 훈훈한 이야기의 서두일 수 있었다. 이 추운 날, 게다가 롱패딩이 요즘 유행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터. 롱패딩과 후원하는 아이를 동시에 떠올렸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10여만원짜리를 사주려고 했는데 아이가 20만원짜리를 말해서 분노했다는 게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 달치 소액 후원금에 해당하는 몇 만원이 자신이 후원한 아이의 선악을 가를 정도의 액수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충격은 두 벌의 롱패딩이 아니라 두 아이 사이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가 선행을 베풀며 그린 아이와 현실의 아이가 너무 달랐던 것이다. 

후원자와의 직접적인 만남도 거절하고 가난한 주제에 여느 아이들과 똑같은 롱패딩을 입으려는 아이. 그는 당장 후원 중단을 통보했고 아이에 대한 비난 글을 올렸다. 그는 아이가 자신을 ‘물주’로 본 것 같다며 분노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자신의 분노에 대해 되묻길 바란다. 후원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가 자신을 ‘물주’로 본 것 같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이 아이를 ‘사물’로 본 것은 아닌지. 그는 후원자로서 돈을 주었지만 혹시 아이한테 인간을 빼앗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172107025&code=990100#csidx591512e57b2c00fa19dc2dc67fe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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