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고병권의 묵묵]내 친구 피터의 인생담

by 뉴미 posted Apr 10,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내 친구 피터, 그는 목소리가 정말 컸다. 말하는 게 사자후를 토하는 듯했다. 은유 작가는 그를 두고 ‘아이를 낳듯’ 말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그가 온몸을 비틀어 내보내는 말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오는 아이들 같았다. 그 목소리는 노들야학 첫 수업 때 분위기에 눌려 백기투항 직전에 있던 나를 살려준 지원군이기도 했다. ‘야, 이거 골 때리네!’ 그가 간간이 넣어주던 추임새가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환영사였다. 

내 친구 피터, 그가 제일 힘들어 한 과목은 한글이었다. 복지관에서 시작해 20년을 배웠다는데 여전히 글 읽는 것이 신통치 않았다. 낱글자는 소리내서 읽을 수 있는데, 단어가 되고 구절이 되면 처음 읽은 글자들이 궁둥이를 슬슬 빼기 시작하고, 문장 끝에 이르면 앞서 읽어둔 단어와 구절들이 다 도망치고 없다고 했다. 지독한 난독증이었다. 그런 그가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듣기 능력 덕분이다. 그는 읽을 수 없지만 들을 수 있었다. 귀를 통해 들어온 것들은 신통하게도 기억에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게 자랐다. 그러니 누군가 소리를 내서 읽어만 준다면 철학책도 거뜬히 읽어낼 수 있었다. 

내 친구 피터,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사실 그는 좋은 작품을 하나 썼다. ‘국회의원들에게 드리는 보고’라는 글인데 참으로 명문이다. 카프카의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차용한 것으로 원고지 20장 분량의 짧은 인생담이다. 뒤늦게 이 인생담을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빨간 피터’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 이름으로 불러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는 이미 그 글만큼의 짧은 삶을 마감해버렸다. 

내 친구 피터, 그는 술을 참 많이 마셨다. 그건 두 방의 총탄 때문이다. 그 점에서도 카프카의 피터와 같았다. 원숭이 피터는 사냥꾼에게 두 방의 총탄을 맞았는데, 한 방은 얼굴을 스치며 붉은 흉을 남겼고, 다른 한 방은 둔부에 박혀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게 만들었다. 첫 총탄이 ‘빨간 피터’라는 이름을 주었고(사람들이 그 붉은 자국만을 주목했기에), 두 번째 총탄은 그를 절뚝거리며 살아가게 했다. 내 친구 피터도 두 방의 총탄으로 ‘장애인’이라는 이름과 ‘절뚝거리는’ 인생을 얻었다. 다만 그는 카프카의 피터와 달리 두 방 모두 가슴에 맞았다고 했다. 장애인인 주제에 성깔까지 못돼먹었다고 한 방 맞았고, 절뚝거리는 주제에 큰 소리로 웃는다고 또 한 방을 맞았다. 가슴이 그렇게 뚫렸으니 술을 마셔도 고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부어댄 모양이다.

내 친구 피터, 그가 총 맞은 후 깨어난 곳도 카프카의 피터처럼 궤짝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는데 그때까지는 궤짝 같은 방구석에만 갇혀 지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후 복지관에도 나가고 했는데 궤짝 크기만 달라졌지, 가두다 풀어주다 하는 식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안전하다며 궤짝 같은 곳에 가두었다가, 장애인의날이 되면 올림픽공원에 잠시 풀어놓고, 다시 버스를 태워 복지관에 풀어놓고, 그런 식이었다. 

내 친구 피터, 그에게는 출구가 필요했다. 세상을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는 자유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곡예사처럼 공중그네를 구르고 날아서 상대방의 품에 뛰어드는 그런 기예 같은 자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를 바란 것도 아니다. 그놈의 ‘함부로’ 하는 자유가 무엇인지는 몸서리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숱하게 당해온 폭력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보다 소중한 것은 출구였다. 절박한 사람, 숨 막히는 사람에게는 출구만이 자유의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 

내 친구 피터, 그는 마침내 야학에서 출구를 찾았다. 공부도 시위도 신통치는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술맛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궤짝 같은 집과 복지관에서 나와버렸다. 집 밖으로 나간다는 게 두려웠지만 마구 ‘개겼다’고 한다. 활동보조인도 없던 때였는데 좀 무모한 탈출이었다. 그러다가 야학수업에서 나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를 만났다. 그는 니체를 읽고는 ‘야, 이거 골 때리네’를 연발했다. 내가 미국에서 지낼 때 야학교사 한 분이 그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딴 건 안 해도 반드시 철학공부는 하고 싶다고 술주정하신다”고. 

내 친구 피터, 그는 스스로 공부하며 출구를 찾아갔다. 정부가 거지 취급한다면, 이참에 당당한 거지근성도 발휘해보고 싶다고. 정부를 상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얻어내서, 뭘 좀 하는 장애인이 되어야겠다고. 그리고 예전에는 잘살든 못살든 혼자 살다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고 나서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울린다는 것이 무언지는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뛰고 날고 춤추겠지만 지금은 일어서는 법, 걷는 법부터 배우겠다고. 그는 그걸 동화로 써보고 싶어 했다. 

내 친구 피터, 그는 모난 성질을 죽이지 않았고, 술도 계속 마셔댔으며, 무엇보다 꿋꿋했다. 술자리에서 그의 불편해 보이는 몸짓을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음식은 흘리면 닦으면 돼. 근데 왜 내가 내 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만둬야지 되냐.”

작년 이맘때였다. 내 친구 피터, 그는 가슴의 흉터가 더 이상 저리지는 않은지, 동화는 어느 정도나 진척되었는지, 어울려 산다는 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그냥 훌쩍 떠나버렸다. 내 친구 피터, 그의 이름은 김호식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4092100015&code=990100#csidx35859dd84fdf16084e67811923ac6a2 


  1. “30주년 맞은 노들, 한국 장애해방운동의 받침돌이죠”

    “30주년 맞은 노들, 한국 장애해방운동의 받침돌이죠” [짬] 노들장애인야학 김명학·천성호 교장 “유감스럽게도 없어요. 나를...
    Date2023.05.12 Reply0 Views396 file
    Read More
  2. [고병권의 묵묵] 죄 없는 시민은 죄가 없는가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입력 : 2022.03.04 03:00 수정 : 2022.03.04 03:02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50일 넘게 장애인들의 출근길 시위...
    Date2022.03.28 Reply0 Views844
    Read More
  3. [김명학의 활동일지] 2020년도 투쟁은 계속 됩니다.

    우리들의 투쟁을 통해 우리의 바람들을 하나 하나 쟁취해서,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함께 만들어 봅시다. 노들장애인야학 김명학. - 권익옹호 활동일...
    Date2020.09.22 Reply0 Views1147 file
    Read More
  4. [세상읽기] 꽃님씨의 복수

    홍은전 ㅣ 작가·인권기록활동가 갇힌 존재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꽃님씨가 떠오른다. 꽃님씨는 서른여덟에 장애인시설에 들어갔다 3년 ...
    Date2020.05.14 Reply0 Views675 file
    Read More
  5. 경향신문 [시선] 잠재적 가해자와 페미니스트

    내가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 K. 그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 교사이기도 하다. 언젠가 교사회의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ldqu...
    Date2020.04.23 Reply0 Views615 file
    Read More
  6. [고병권의 묵묵] 다시 최옥란을 기억하며

    [고병권의 묵묵]다시 최옥란을 기억하며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경향신문에서 보기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
    Date2020.03.31 Reply0 Views516 file
    Read More
  7. 어느 발달장애인의 생존기록 / 홍은전

    한겨레 [세상읽기] 어느 발달장애인의 생존기록 기사입력2019.08.05. 오후 6:40 최종수정2019.08.05. 오후 7:00 홍은전 작가·인권기록활동가 3...
    Date2019.08.12 Reply0 Views920 file
    Read More
  8.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를 만나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를 만나다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연대 등록일 2016.11.15 12:04l최종 업데이트 2016.11.17 16:2...
    Date2019.01.11 Reply1 Views2534 file
    Read More
  9. [고병권의 묵묵] 열두 친구 이야기

    [고병권의 묵묵]열두 친구 이야기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경향신문 오피니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
    Date2018.12.06 Reply0 Views643 file
    Read More
  10. [한겨레] 장애인 시설 밖 생활, 녹록지 않지만 살 만해요

    ?자장애인 시설 밖 생활, 녹록지 않지만 살 만해요 장애인 시설 밖 생활, 녹록지 않지만 살 만해요 입력 2018.11.15 15:43 수정 2018.11.15 17:23 [한...
    Date2018.11.25 Reply0 Views648
    Read More
  11. [경향신문]“처벌 감수하며 불법 집회 여는 건, 무관심보단 욕먹는 게 낫기 때문”

    ? “처벌 감수하며 불법 집회 여는 건, 무관심보단 욕먹는 게 낫기 때문” 이보라 기자 purple@kyunghyang.com 입력 : 2018.11.05 18:16:00...
    Date2018.11.25 Reply0 Views477
    Read More
  12. [경향신문 포토다큐] 느리지만 함께···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노들야학 25년

    [경향신문 포토다큐] 느리지만 함께···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노들야학 25년 뇌병변장애를 가진 이영애씨(52)가 서울 동숭동 노...
    Date2018.11.25 Reply0 Views557
    Read More
  13. 국회 안에서 쇠사슬 목에 건 장애인들 "예산 확대로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국회 안에서 쇠사슬 목에 건 장애인들 “예산 확대로 ‘진짜’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기습 시위&rs...
    Date2018.11.06 Reply0 Views418
    Read More
  14. “돈만 아는 저질 국가”에 날리는 5만원짜리 ‘똥침’

    “돈만 아는 저질 국가”에 날리는 5만원짜리 ‘똥침’ 등록 :2014-04-08 15:50수정 :2014-04-10 09:36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 스...
    Date2018.08.15 Reply0 Views747
    Read More
  15. "리프트 대신 승강기"…장애인 이동권 보장 '지하철 시위'

    http://bit.ly/2Men1QE ​​​​​​​"리프트 대신 승강기"…장애인 이동권 보장 '지하철 시위' [JTBC] 입력 2018-08-14 21:39 수정 2018-08-1...
    Date2018.08.15 Reply0 Views649 file
    Read More
  16. 선심언니 이야기 - 경과보고

    [긴급 진정 기자회견] 우리 야학학생 선심언니, 살려주세요! 폭염속에 장애인 죽음으로 몰아넣는 복지부 활동지원24시간 보장거부 인권위 긴급진정 기...
    Date2018.08.06 Reply0 Views472 file
    Read More
  17. No Image

    mbc 뉴스투데이_마봉춘이 간다_노들야학 급식마당 행사 :) 소식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214&aid=0000844748&sid1=001 [뉴스투데이]◀ 앵커 ▶ 보통 학교가 문 닫을...
    Date2018.06.08 Reply0 Views468
    Read More
  18.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구형에 대한 나의 항변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구형에 대한 나의 항변 [기고] 장애인 차별에 맞서온 박경석 교장 2년 6개월 구형에 반대하며   등록일 [ 2018년01월15일...
    Date2018.02.19 Reply0 Views892 file
    Read More
  19. 어차피 깨진 꿈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집시법 위반으로 2년6개월 형을 구형받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의 최종 선고일이 모레로 ...
    Date2018.02.06 Reply0 Views559 file
    Read More
  20. 박경석이라는 계보

    김원영( 변호사·장애학연구자)   박경석이라는 계보   “물러서지 맙시다. 여기서 물러서면 또 수십년씩 집구석에 처박혀 살아야 합니다.”   노들장애...
    Date2018.02.06 Reply0 Views532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