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깨진 꿈

by 노들지킴ㅇ; posted Feb 0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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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집시법 위반으로 2년6개월 형을 구형받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의 최종 선고일이 모레로 다가왔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긴 탄원의 행렬에 합류하기 위해 많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검찰의 공소장은 달랑 7쪽인 데 비해, 변호인단의 변론서는 110장이 넘고, 탄원서는 7천장에 가까웠습니다. 낙인을 찍는 일은 간단하지만 그것을 지우는 일은 무척 어렵다는 걸 실감합니다. 어떤 사람의 평생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경석의 꿈은 외항선을 타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983년, 스물넷의 나이에 행글라이딩을 하다 사고로 장애를 입습니다. 5년을 집에서 보냈습니다. ‘허리 아래 괴물같이 달라붙은’ 하반신처럼 삶이 무감각했습니다. 그는 죽기로 결심합니다. 슬퍼할 어머니를 위해 집이 아닌 곳에서 죽기로 하죠. 고향인 대구가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구까지 갈 방법이 없습니다. 택시를 불러야 했지만 택시비도 없었죠. 마침 형이 성경을 백번 읽으면 용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죽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죠.

 

  1994년 박경석은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던 청춘들과 어울리며 정을 나누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비장애인이던 교사들 대부분은 때가 되면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났습니다.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하늘을 날고 싶었던 그는 항구처럼, 공항처럼 그 자리에 남아 떠나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닉네임을 ‘어깨꿈’으로 정한 것이. 어차피 깨진 꿈. 어쩌면 그 뼈저린 포기가 그를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2001년 2월6일 지하철 서울역 플랫폼. 한 무리의 장애인들이 선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 장애인이 떨어져 죽은 일에 항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애인이 한 달에 5번도 외출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하철이 30분간 멈추자, 30년간의 절망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병신 새끼들. 선량한 시민들이 잔인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때 박경석이 이렇게 외칩니다. “좋습니다. 우린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이고 싶습니다. 병신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줍시다.” 순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작은 불씨가 켜졌습니다.

 

  그리고 공소장 맨 첫 페이지에 있는 그날, 2014년 4월20일. 우리는 여전히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도착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고속버스터미널에 있었습니다. 그곳엔 우리가 함께 탈 수 있는 버스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차선을 넘었다’는 말은 이상합니다. 길은 없었으니까요.

 

  박경석 대표가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가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터미널까지 오는 데 17년이 걸렸는데, 대구까지 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까요.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라는 말을 하는 데 그의 인생 전체가 필요했습니다. ‘고작, 버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가 싸워온 건 평생 자신을 옥죄던 굴레였고, 그 싸움이 그를 살게 했으므로, 저는 이 문장이 어쩐지 숭고하게 느껴집니다. 누군가의 평생이 있어야만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상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운 위로입니다.

선처를 바랍니다.
 

[세상 읽기] 어차피 깨진 꿈 / 홍은전, 한겨레 신문, 2018년 2월 5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0925.html#csidx8768127df22b2b986281ab4fc01cf5f onebyone.gif?action_id=8768127df22b2b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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