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6. 세월호 & 노들 집담회 녹취록

by 뉴미 posted May 2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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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6. 세월호 & 노들 집담회 녹취록

 

홍은전 :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4.16세월호와 노들야학 집담회 진행을 맡은 홍은전입니다. 반갑습니다. 무려 2년 만에 저도 이 자리에 섰어요.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신데요. 휴직교사입니다. 2년 전까지 수업을.... (언제 복귀해요?) 다 알고 계시네요. 복귀는 빠른 시기에 하겠습니다. 네 그 제가 2년 전에 야학휴직을 하고요. 우연치 않게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고 그 말씀들을 기록하고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었어요. 네 그래서 오늘 두 세월호 유가족들과 노들야학이 만나는 자리에 진행을 맡게 됐구요. 너무 떨려서, 2년 만에 서다보니까 너무 떨려서 대본을... (하나도 안 떨리시는데?) 제가 연기를 잘해요. 되게 안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고 있습니다. (전화벨 소리) 제가 안 된다고 했죠 이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단속을 이쪽 동네만 했더니 요기서 벨소리가 나버렸어요. 네... 노들야학은 세월호 추모제와 1주기 행사에서 함께 했었는데요. 이렇게 유가족분들을 야학에 직접 초대한 것은 처음이에요. 너무 바쁘실 것 같아서 저희가 이렇게 오래 기다렸던 거죠? (네~~~~) 우리가 농성 이웃이기도 합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아래에 저희가 2년 동안 장애인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세월호 농성장도 저희처럼 지하에서 하고 있던 저희처럼 길어지고 있는데요. 2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2014년 4월 16일 진실은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론에서는 거짓말처럼 세월호 관련 뉴스가 다 사라졌어요.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 마련했구요. 먼저 20분짜리 세월호 영상을 보고, 영상 다 본 뒤에 두 분 모시고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네 영상 볼게요. 제목은 <바다에서 온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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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 네. 잘 보셨나요? 봐도 봐도 마음이 아프죠? 두 분 앞으로 모시고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 오늘 이야기 전해주러 오신 분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원고 희생자 2학년5반 이창현 학생의 어머님이시구요.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2년 동안 서명지기 활동을 하고 계시는 조미선 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마이크는 잘 되나요? 두 분 인사 좀 부탁드릴게요. 어머님부터...

 

최순화 : 안녕하세요. 네 저는 고 2학년5반 이창현 엄마 최순화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조미선 : 저는 광화문에서 서명지기로 활동하고 있는 세 아이의 엄마인 조미선입니다. 반갑습니다.

 

홍은전 : 네. 저희가 언론에서 뉴스에서 세월호 관련된 소식을 정말 찾아서 듣지 않고서는 들을 수가 없거든요. 오늘 듣고 싶은 말씀이 많아서요. 바로 이야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구요. 창현이에 대해서 좀 듣고 싶습니다. 가족사진이구요, 맨 앞에 앉은 아이가 2학년5반 다녔던 이창현 학생입니다. 제가 금요일에 돌아오렴이라는, 어머니 인터뷰하신 책을 보면요. 창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방석이라는 시가 있어요. 어머님이 창현이가 5학년 때 새벽기도를 늘 다니셨대요. 그래서 창현이가 같이 다녔는데 가장 늦게까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창현이가 늘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쓴 시래요. 짧으니까요. 집중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제목 방석. “아주 방석이 비싸더라도 우리 엄마 무릎 밑에 얹으고 싶어요.” 네 이런 시입니다. 제가 이 시를 어제 이제 ... 전에도 들었는데 어제 설거지 하다가 다시 한 번 팟캐스트로 들으면서 어 정말 눈물이 철철 났었는데 ... 네 시가 너무 귀엽고 따뜻한 거 같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는데 그 아이가 세상에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한테 창현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게요. 창현이는 어떤 아이였고 어머님한테 어떤 존재였는지...

 

최순화 : 그냥 보통의 18살을 지내고 있는, 지내고 있었던 보통의 청소년이였어요. 공부하는 거 싫어하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 제일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고 또 엄마를 제일 싫어하고 사춘기라. 창현이 누나가 하나 있는데 누나도 사춘기를 겼었는데 그래도 대화는 됐거든요. 딸하고는. 근데 남자아이는 대화가 안 되더라고요. 아예 말하는 걸 싫어하더라구요. 그거를, 근데 그게 사춘기의 특징이었는데 저는 저를 정말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엄마를 싫어했다기보다 사춘기의 특징이었어요. 창현이 가고 나서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는 걸 알게는 됐는데 그게 제일 속상하죠. 서로 좋은 모습을 보다가 헤어진 게 아니라 저도 오해를 하고 창현이도 오해를 했던 거 같아요. 엄마가 별로 지 안 좋아한다고. 그건 있었어요. 제가 낮게 평가하는 거. 왜냐면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자랑할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럼에도 공부도 안 하지 부모에게 살갑게도 안 하지. 그리고 교회를 잘 다니기는 하지만 신앙이 좋아보이지도 않고. 아무튼 엄마의 기준이, 제가 정해놓은 기준에 다 미달이어서. 제 마음속으로도 그랬어요. 사실은 낮게 평가하고 있었어요. 그 부분이 제일 미안해요. 그냥 보통의 이이였는데, 그게 사춘기 때 당연한 거 였는데 그걸 몰라준 게 제일 미안하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둘도 없는 아들이었죠.

 

 

홍은전 : 어머니가 영상을 많이 보셨을 텐데도 볼 때마다 눈물을 참으실 수가 없으신 것 같아요. 두 번째 질문은요. 저희도 이제 1주년까지는 특별법 제정이라는 하나의 목표가 너무 뚜렷한 목표가 있어서 거리에서도 많이 뵙고 언론에서도 많이 뵀었는데 지금은 저도 이렇게 세월호 간담회를 준비하려고 막 찾아보지 않으면 요즘 세월호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잘 몰라요. 아마 저보다 더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어머님은 유가족분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최순화 : 오늘 광화문에 2시에 원래 교회 아이들 몇 명이 간담회 온다고 그래서 2시까지 왔어요. 그런데 2시에 오늘 광화문에서 또 가족협의회가 기자회견을 했어요. 기자회견을 한 이유는 특별조사 위원회에 이제 공무원이 들어와 있거든요. 해수부에서 파견한 공무원이 들어와 있는데 그 사람이 주도적으로 조사를,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방해하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고 이석태위원장이나 김종원 변호사님을 고발하고 유가족까지 고발하는 그런 일들을 꾸미고 실제로 지금 특별조사위원회를 무력화시키려고 꼼짝 못하게 해체하려고까지 하는 그런 꾀를, 꾀라기보다 아무튼 그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의 힘을 동원해서 그런 짓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특별조사위원회 가동하고 나서 계속하고 있어요. 조사를 못하게. 세월호 참사 진실을 조사하지 못하게 계속 방해를 하고 있어서 이제 그냥 이대로 두면은 더 그 사람들의 하는 행동이 더 노골화되고 아무런 고민들... 무서워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방해를 할 게 뻔하기 때문에 이제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고소를 하기로 해서 오늘 고발했고요. 제 가족들이 지금도 언론에 말씀하신 것처럼 나오지는 않지만 여전히 활동하고 있어요. 오늘 여러분 뵈러 온 것도 그 것 중의 하나고. 처음부터 저희 가족들이 모여서 한 얘기는 진실을 밝히는 것. 왜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됐는지 알려달라는 거잖아요. 지금도 똑같거든요. 그래서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특별법에 의해서 특별조사위원회가 가동이 되고 있는 건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라. 제일 중요한 것은 그거죠. 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하게끔 하는 것, 그런데 힘이 너무 없어서 오늘 모든 언론사에 기자회견을 한다고 공문을 보냈음에도 열 개 언론사가 안 돼요. 저희 기자회견을 취재하러 온 언론사는 한 열 개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메이저언론사는 안 왔죠. 물론 그러니까 이런 정보들이 계속 묻히고 묻히고 반복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저희 가족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거. 4.16가족협의회가 비영리사단법인으로 등록을 22일에 했어요. 경기도에서 해줬어야 되는데 그것을 경기도에서 안 해줘서 서울시로 옮겨서 일 년 만에 비영리법인으로. 사단법인 설립목적도 사실은 진실규명, 안전사회 만드는 거 이런 목적이거든요. 법인을 만들어서 이제 좀 더 체계적으로 진상규명활동 앞으로도 계속할 거고 저희 가족들이 2년 가까이 싸우다보니까 조금은, 실제적으로 지치기도하고 좀더 마음도 많이 지쳐서 건강이 안 좋은 분들도 많으세요. 그래서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안 될 때 가 있더라구요. 그럼에도 저희가 갈 길은 그 길밖에 없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진실을 규명하고 그전에 아직도 9명의 미수습자가 세월호 안에 있기 때문에 9명 찾는, 인양해서 9명 찾는 거 그 다음에 진실 밝히는 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속 부모들이 활동한다는 거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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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 뒤에 사진이 한 장 있는데요. 요것도 어떤 거였는지 설명해주세요.

 

최순화 : 1차 삭발이 4월 2일 광화문에서 62명? 오십몇명?했고. 2차 삭발은 작년 4월 4일 토요일로 기억하는데 안산 분향소에서 삭발하고. 1박2일 아이들 영정사진을 들고 비가 와서 노란 게 비옷이에요. 비옷 입고 안산에서 광명에서 하룻밤 자고 또 광명에서 다음날 광화문까지 1박2일 행진했던. 삭발을 하고서 1박2일 아이들 영정사진을 들고. 그때가 시행령이죠. 특별법 시행령을 정부에서 내놨는데 특별법도 반쪽짜리인데 그 반쪽짜리 특별법마저 이제 무력화시키려는, 전혀 쓸모없게 만들려는 시행령을 정부가 발표해서 그 시행령 폐기하라고 저희가 1박2일 걸었던 그 사진입니다. 작년 4월입니다.

 

홍은전 : 네 다음 질문을 조미선 선생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 활동에 참여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광화문 서명지기라고 소개해주셨는데 어떤 활동을 주로 하시는지 얘기해주세요.

 

조미선 : 네. 난생 처음이었어요. 음 이렇게 저와 관계가 없는 사건에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정말 미안해하고 이렇게 애도했던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 꽃보다도 더 예쁜 아이들이 그렇게 어이없게 죽는 모습을 저희가 TV로 지켜봤잖아요. 정말 너무 충격이었어요. 특히 옆에 있는 창현엄마가 저와 동갑이거든요. 희생된 아이들과 저희 아이들이 또래인 거죠. 그러다보니까 감정 이입이 더 잘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치 내 아이가 그 바다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고. 또 이 참사가 음... 그 사회의 그 부조리의 총합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 거잖아요. 단원고 아이들이 정말 그날 어쩌다가 재수가 없어서 그 곳에 탄 것이지 우리 아이가 탈 수도 있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정말 바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TV만 보고 울고만 있었었어요. 예. 그러다가 참사 초기에는 정말로 많은 봉사자들이 진도로 내려갔잖아요. 저는 내려가지는 않았어요. 5월이 들어서면서 시신들이 많이 올라오면서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빠졌어요. 그러면서 이제 1박 2일 코스로 해서 단원고 이름으로 봉사자를 모집하더라구요. 페이스북을 보니까. 그래서 거기에 신청을 해서 남편과 2014년 5월 16일 처음 진도를 내려갔어요. 그리고 거기서 봉사를 하게 된 곳이 팽목항에 검안소 앞에 있는 가족대기실이었어요. 그날이 5월 16일 그곳에서 하루 종일 있었구요. 올라오는 시신이 없어서 남편과 계속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새벽에 그리고 5월 17일 참사 32일이 되던 그날 새벽에 한 학생이 수습이 됐어요. 그 학생이 2학년 8반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올라온 아이였어요. 조찬민이라는 아이였어요. 예. 그리고 제가 그 부모님과 함께 그 아이의 시신을 검안소에서 보게 됐어요. 원래 봉사자들은 검안소에 안 들어가거든요. 그리고 벌써 32일이 되다보니까 관계자들이 시신을 안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래서 관계자들이 부모님에게 보지 말라고 계속 설득을 했는데 찬민이 어머님이 계속 우기셨어요. 이렇게 힘들게 아이가 엄마를 찾아서 돌아왔는데 아이의 모습이 이상하다라고 해서 내가 안 보면 되겠느냐고. 나는 무조건 가서 찬민이를 마중을 가야 되겠다고, 괜찮으니까 나를 검안소로 보내달라고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제 검안소로 들어가는데, 막상 검안소에 들어가는 그 길까지 찬민이 어머님이 계속 주저앉으시는 거예요. 너무 겁이 났던 거예요. 그래서 봉사자인 제가 옆에 있다가 어머님을 안고 들어갔어요. 안고 들어가서 검안소 안에 들어갔는데 기가 막혔어요. 약품 냄새하고요, 시신 썩는 냄새 하고요. 이게 혼합이 돼가지고요. 머리가 너무 아프고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울어야 되는데요. 처음에는 울지를 못하세요. 왜냐면 이게 너무 충격이거든요. 예. 그러니까 어머니가 왜 우리아이가 왜 이렇게 됐어, 우리아이가 왜 이렇게 됐어, 누가 너를 이렇게 했어 그러면서 다가가서 아이를 만지려고 하는데 또 관계자가 못 만지게 하는 거예요. 왜...? 만지면 아이가 뭉그러지거든요. 약품으로 겨우 처리를 해놨기 때문에 만지면 뭉그러지니까. 아이를 만지고 싶어도 만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서서 통곡을 하시면서. 그래도 찬민이에게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돌아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엄마한테 돌아와줘서 너무 고맙다고. 예. 그러면서 또 우시는 거예요. 뭐라고 우시냐면. 그런데 어떻게 너만 데리고 올라가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니 친구들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너만 데리고 올라가니, 미안해서 어떡하니. 제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기가 막힌 거예요. 자식이 죽었는데 고맙다라고 얘기를 하구요. 그 다음에 또 미안해하구요. 시신을 찾지 못한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또 제대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이게 도대체 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제 한 5분 정도를 그곳에 있다가 어머니하고 바깥에 나와서 이제 찬민이를 안산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준비를 하는 동안에 가족대기실에서 어머니하고 같이 있었어요. 있으면서 이제 어머니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찬민이에 대한 얘기도 좀 많이 듣고 그랬는데. 찬민이 어머님이 사진을 하나를. 음. 뭐죠. 휴대폰에서 사진 하나를 딱 꺼내서 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게 지금 뒤에 있는 이 사진이에요. 제가 이제 이거를 보내달라고 그랬거든요. 이게 2학년 8반 단체사진이에요. 이 반 아이들이 4월 16일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에 단체사진을 찍었더라구요. 예쁜 교생선생님이 오셔가지구 교생선생님이 남자애들한테 예쁜 짓을 하라 그랬대요. 그래갖구 남자 아이들이 이렇게 다 예쁜 짓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어머님이 이 사진을 보여주시면서요. 있잖아요, 이 아이들 중에요, 두 명만 살았어요. 다 죽고요. 단 두 명만 살아 돌아왔어요. 너무 기가 막혔어요. 이렇게 젊고 건강한 아이들이 왜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정말 이해가 안됐어요. 그런데 저희가 알게 됐잖아요. 그 잠수부들의 증언을 통해서. 이 아이들이 그냥 죽은 거 아니거든요. 예. 처음에는 구조를 기다렸구요. 어른들이 구해줄거라고 기다렸구요. 그 다음에는 안 되니까 본인들이 탈출하려고 엄청나게 노력을 했어요. 그래서 잠수부들이 증언하는 거 들어보니까 아이들이 온몸으로 문을 뚫고 나왔구요. 철문이 휘어지도록 두드렸구요. 그리고 손가락이 다 빠지고 휘어지도록 벽을 어두운데서 벽을 뚫고. 예. 그리고 출구를 찾았거든요. 이렇게 아이들은 살기 위해서 그렇게 투쟁을 했던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정말 아이들이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해경과 정부 관계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거를 모르겠는 거예요. 예. 너무 화가 났어요. 너무 기가 막혔어요. 이 사진을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전날 검안소에서 계속 기도할 때 들었던 생각들이 이 아이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찬민이 어머니한테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얘기를 했어요. 어머님. 찬민이와 이 찬민이 친구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에요. 그냥 억울한 죽음이 아니에요. 이 아이들의 죽음을요. 한 알의 밀알로 이 땅 가운데 심겨져서요. 이 썩은 나라가 완전히 뜯어 고쳐질 거예요. 완전히 바뀌어질 거예요.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찬민이 어머님이 듣고 가만히 계시는 거예요. 예. 제가 순간적으로 아무 말씀을 안 하시니까. 아. 이거 내가 얘기를 잘못 했구나. 왜? 내 자식이 죽어서, 죽었는데, 돌아올 자식이 없는데 이 나라가 안전한 나라가 되든 무슨 상관이 있냐라는 거지요. 그 생각이 언뜻 딱 들더라구요. 그래서 아, 내가 말실수를 했구나, 그랬는데 찬민이 어머님이 저를 빤히 쳐다보시면서. 그래요? 그러면 저 드릴 수 있어요. 제 아이의 죽음으로 해서 이 나라가 고쳐질 수 있다면 개조될 수 있다면, 저 제 아들 드릴 수 있어요. 정말 놀랬어요. 그리고 또다시 한참 생각하시더니 저한테 또 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런데요. 정말 바뀔까요? 정말 바뀔 수 있을까요. 이 나라가? 그래서 제가 단호하게 얘기를 했어요. 당연하죠.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이런 참사를 두고도 이 나라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게 나랍니까? 당연히 바뀝니다. 그렇게 제가 큰소리를 쳤어요. 그리고 이제 헤어져서 서울로 올라왔는데요. 가만히 보니까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바뀔 뿐만이(바뀌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요. 진상조사도 안 되는 거예요. 진실규명조차도 안됐어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어요. 제가 찬민이 어머니한테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겠고, 그게 또 하나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주셨던 마음이기 때문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팽목항에 또 1박2일로 몇 번을 내려갔다가... 어. 7월달부터는 이제 국회에서. 어. 3백..그... 뭐죠? 7월23일가. 350의.. 그 서명이..뭐죠?. 에..예. 그것 때문에.. 모인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그날 처음 제가. 국회에 가서 피켓팅을 했어요. 예. 죽음앞에 진실을 말하라고, 피켓팅을 하루종일 했구요. 그리고 그 다음날에 광화문 농성장이 차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그때부터 이제 서명지기가 됐는데. 제가 원래 어렸을 때 외국에서 자랐어요. 한 10년 정도를 외국에서 살고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지금 대학에서 영어강사로 있거든요. 근데 의외로 광화문에 외국인들이 많은 거예요. 근데 외국인들이 이게 뭔지를 모르고. 왜냐면 거기 영어로 되어있는, 뭐 서명용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초창기에는. 그래서 이 분들이 계속 이걸 도대체 축젠가 뭔가를 모르니까 쳐다보고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분들한테 제가 설명을 하기를 시작을 했어요. 이게. 세월호가 뭐고. 세월호가 어떻게 일어났고 지금 유가족들이 이렇게 해서 농성장을 만들었다. 이런 내용을 했더니 그러면 내가 서명을 해도 되냐고. 근데 한국인 서명용지뿐이 없었거든요. 근데 물어봤더니 해도 된대요. 그래서 이제 외국인들한테 서명을 받게 됐구요. 지금은 외국인 서명용지도 만들고. 번역 같은 것도 좀 하고 해서. 지금은 확실하게 이제 거의 2년 동안 광화문 서명지기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

 

홍은전 : 예. 저희도 광화문에서 서명하다보면 외국인분들 오시면 난감하잖아요. ㅎㅎ 그때 연락드리면 지하로 내려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ㅎㅎ. 예. 다음 질문은요. 최근에...(다음다음으로 넘겨주시겠어요)..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세월호. 단원고 학생들이 이제 졸업을 하고 스무 살이 되었을 그럴 때입니다. 근데 교실에는 아이들의 영정만 이렇게 돌아와 있구요. 예. 이 꽃이 놓인 자리는 전부 다 돌아오지 못한 희생된 학생들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아직 영정으로도 돌아오지 못한 학생이 4명이 있고. 그리고 선생님이 두 분이 계시구요. 단원고 학생이 아닌 일반인 실종자 분들이 세 분. 이렇게 총 아홉 분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데 교육청은 아이들의 명예졸업식을 치른 후에 이 교실을 철거하겠다 라는 입장을 발표를 해서 최근에 좀 논란이 됐었거든요. 예. 그건 어떻게 됐는지 어머님이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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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화 : 당연히... 2014년 사고 직후부터, 2014년 말까지도 그랬을 거예요. 아마. 당연히 교실은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거고. 그때까지 인양이 안 돼서, 뭐 이런, 졸업을 하느니 마느니 이런 사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명도 생각지 않았을 건데. 2014년도에 경기도 교육감이 약속을 한 게 있어요. 교실을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 생존 아이들 78명이 졸업할 때까지는 유지시켜 주겠다, 이대로 유지해주겠다, 그런 약속을 했었는데. 미수습자가 있는 상태에서 졸업을 해야 되는 이런 상황이 오면서. 재학생 부모들이 교실, 아이들 졸업할 때까지만 교육감님이 유지시켜 주기로 했으니까, 약속을 했으니까. 빼라, 이런 요구를 2015년 후반기부터 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먼저 재학생 부모들, 그 다음에 학교 측에서. 교실을 빼는 거에 대해서 자꾸 여론화 시키고. 사람들이. 먼저 교실을 빼야 된다는 여론몰이를 하면서 서명도 받고 막 그랬어요. 그즈음에 저희가 해법을, 그니까, 교실을 유지시키면서 신입생 받을 수 있는. 올해 2016년 신입생이 있을 공간이 없는 게 문제인거잖아요. 그래서 신입생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 증축도 할 수 있고. 그 옆에, 학교 옆에 바로 산이 있는데 그 산을 깎아서 교실을 지으면 충분히 가능한. 그런 시기였거든요. 그런 대안들을 내놨는데 그 대안이, 산 주인이 뭐, 산을 안 팔겠다 이렇게 나왔고. 교실 증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냥 시간만 지나면서 졸업식 날이 다가온 거예요. 그래서 12일날 졸업을 하긴 했는데 그 전부터 저희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교실 조치 이후에 대해서 저희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어요. 부모들이 나섰고. 그다음에 안산에 안산기억저장소라고 있는데. 기억저장소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이 단원고 조치, 필요성에 대한, 굉장히 의견을 여러 사람들한테 들었고. 그래서 기억저장소 중심으로 이제 단원고를 조치해야 된다는 그런 여론들을 많이 형성을 해서, 교육감이 지금은 가족들 동의 없이는 빼진 않겠다 이렇게까지는 나왔는데, 그래도 저희는 불안하죠. 근데 교실이 지금 10개의 교실과 1개의 교무실, 선생님들이 있던 공간이 이대로 유지하는 거에 대해서 재학생들은 학습권 침해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어떻게 공부랑 추모랑 같이 할 수 있느냐, 한 공간에서 저걸 같이 할 수 있느냐, 그렇게 얘기를 해요.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게 어떤 사건인지를 벌써 잊은 거죠. 이게 왜 일어났는지, 도대체 어떤 사건인지를 잊어버리고. 그냥 내 아이만 생각하는 그 부모들의 마음이 교실을 치우라고 이렇게 표출이 된 거 같아요. 이게 어떤 사건이에요? 도대체. 그 때 참사 초기에 온 나라가 다 뒤집어졌잖아요. 사실은 다 뒤집어졌잖아요. 그때 다 바꿔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국가 개조해야 된다 그랬고. 바꾸지 않을 부분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 바꿔야 되는 게 사실은 맞는 건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교육계, 그 학교에서부터 이거를 그냥 다 덮고 넘어가자. 없애버리자. 흔적을 없애자. 이런 시도로 저희는, 그니까 유가족 입장에서는 이렇게 들렸거든요. 이런 일을 당하고도 또 그냥 없었던 일처럼 똑같이 입시교육을 하고. 아이들한테는 그냥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를 하는 그런 교육을 똑같이 이어가려는 이런 태도를 저희는 참을 수 없었고. 그래서 최소한 이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그리고 먼저 미수습자를 다 수습할 때까지, 인양할 때까지, 그때까지는 저희가 교실은 보존해야 된다는 주장을 계속 할 겁니다. 교실이 그냥 단순히 아이들의 학습권이나 뭐 어떤 추모시설... 그게 이제 혐오까지 가더라구요. 혐오시설까지 그렇게 얘기가 가더라구요. 그거를 넘어 우리나라 교육 바뀌어야 되잖아요. 그 상처에, 이 직격탄을 맞은 단원고가, 또 경기도에서, 그런 결정을. 교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250명이 어느 날 갑자기 딱 사라져 버린 그 현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 공부해야 되니까 그냥 치워버려, 이런 거는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그 현장을 볼 수 있는 게, 저희는 단원고 교실이라고 생각하고. 최소한 9명이 수습되고, 인양되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더 많은 국민들이 교실을 봐야 되고. 그래서 어떤 사건인지를 확인하는 그런 장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홍은전 : 예. 어머님은 최소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마 다들. 이 현장을 방문하신 분들은 알거예요. 저 현장은. 끝까지 지켜내야 되는 공간 중에 하나인 거 같아요. 저 교실이 저렇게 있는 저거랑 똑같은 교실이 무려 10개가 있습니다. 저 학교에. 예. 우리로 치면 불수레반, 한소리반, 청솔반 있잖아요. 반이 5개 있잖아요. 5개에.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남은 그런 거예요. 예. 그리고 교무실도 교사 분들이 두 분 빼고 다 돌아가셨고. 그래서 2학년 교사들의 교무실까지 해서 단원고는. 이렇게 다 가면. 주말마다 개방이 되는데요. 방문하시면. 세월호 참사가 어떤 건지, 이렇게 기사로 알고 책으로 알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바로 공기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로 하는.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깊이의 사고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 다시 사진을 앞으로 좀 돌릴게요. 이번에는 청문회 얘기를 좀 여쭤볼게요. 유가족 분들하고 같이 보셨다고 들었어요. 청문회에 대해서. 역시나 청문회에 대해서도 뉴스에 참 안 나왔거든요. 예. 그래서 그 얘기를 좀 말씀해 주세요.

 

조미선 : 저는 솔직히 청문회를 못 봤어요. 왜냐면 첫날에.. 저하고 친한 분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병원에 있었어요. (은전: 그럼 그 얘기를 좀 해주세요.) 첫날에 그,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세월호의 의인이라고 불리우는 김동수 씨 있잖아요. 그분도 저희 굉장히 친하게 지내는 분이시거든요. 그분이 자해를 했잖아요. 두 번째 자해였어요. 작년 4월에 한 번 자택에서 한 번 손목을 그어가지고 한번 자살시도를 했었는데. 이번에 청문회에 또 한 번 첫째 날에 그래서. 제가 아침 일찍부터 갔는데, 그 분을 모시고 병원을 다니느라고 제가 결국에는 다 못 봤는데. 그 김동수 씨 얘기를 좀 하자면. 저희가 이렇게, 세월호 뭐랄까. 이 피해자들이요. 희생된 304명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희생된 아이들이 있고. 그니까 유가족이 있구요. 그리고 미수습자, 옛날에 실종자 가족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미수습자라고 하지요. 왜 우리가 미수습자라고 하냐면 실종된 게 아니거든요. 바다 그러니까 뱃속에 그대로 있는데. 바다에 있는 곳을 아는데 수습을 안 해줬기 때문에 못 건진 거거든요. 그래서 미수습자라고 불러 달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미수습자 가족이라고 얘기를 하고요. 그 다음에 생존자들이 있어요. 김동수 씨 같은 경우는 생존자예요. 보통 저희가 보면요. 미수습자 가족은 유가족을 굉장히 부러워해요. 왜? 시신이라도 찾아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되게 부러워해요. 그리고 유가족은 생존자를 되게 부러워해요. 왜냐하면 내 자식은 죽었는데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 생존자가.. 저희 봉사자들은 이 세 부류 사람들을 다 보고 있거든요. 근데 그런 생존자가 그러면은 행복할까. 행복한 거는 단 하루였던 거 같아요. 살아 돌아온 그 기쁨 하나였던 거 같아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이분들도 굉장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어요. 아이들도 물론 그렇지요. 특히 김동수 씨 같은 경우는 배에서 맨 마지막으로 나오신 분이에요. 맨 마지막으로 나오고. 그.. 소방호스를 가지고, 그 기울어져가는 거의 90도 기울어져가는 그 배에서 소방호스를, 처음에는 커튼을 뜯어서 내렸대요. 내려가지고 아이들을 구조를 하는데 힘이 없으니까 툭툭 끊어지더래요. 그래서 다음에는 소방호스를 몸에다가 감고서 소방호스를 내려가지고 아이들을 구해냈는데. 몇 명 구하지도 않았는데 물이 굉장히 빨리 차고 올라오더래요. 그래서 나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아이들이 밑에서 계속 소리쳤대요. 아저씨 가지마세요. 제발 저희 좀 살려주세요. 가지마세요. 아저씨. 그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우리 버리고 가지 마세요.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요. 마지막 순간에 자기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소방호스를 던지고 마지막 배를 타고 나오셨어요. 근데 그게 너무 힘이 들어가지고 지금까지도 그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잠자면서도 허공에다가 손을 이렇게 계속 소방호스를 잡는 시늉을 하고 있구요.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문을 갑자기 활짝, 그 창문을 활짝 열고서요. 다 뛰어내리라고 소리를 지르고요. 이런다는 거예요. 이 트라우마가 상상도 못하고. 따뜻한 물에.. 아이들이 그.. 물이 엄청나게 차가웠다는 거예요. 본인이 그 물을 담가봐서 알았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거의 동사로 죽었다는 거예요. 그 찬물에 그렇게 얼어있는 물에 아이들이 그렇게 죽은 거를 알기 때문에 자기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못했대요. 집에서도 지금도 가장 찬 곳에서 자기 방을 두고 계시거든요. 이런 분이세요. 그랬는데,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번에 자해를 한 이유는 그렇더라구요. 증인들이 나와 가지고 정말로 거짓말만 했잖아요. 다 모른다 그러고 거짓말만 하고. 근데 이 분이 자해하기 직전에 그 분이 누구였어요? 박상욱 경장이라는 분이 ....조류에 밀려서..뭐..하여간 제가 그걸 거의 못 들었는데. 어쨌든이 분은요. 아이들을 그렇게 구하고 나서. 그 다음에 나와가지고 제일 먼저 만난 해경한테 그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저기에. 어느 곳에 아이들이 몇 명이 있습니다. 빨리 가서 구해주세요. 그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랬는데. 알겠습니다. 이미 특공대 다 들어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 구해올거예요.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 근데요. 그 분이요. 자기가 얘기했던 사람이 그 사람이었대요. 그 박상욱 경장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다.. 청문회에서 헛소리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분이 참다참다 못해서 벌떡 일어나서, 위증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겨낼 수 없으니까 가지고 있던 가위를 갖고 자기 몸을 다 찔러버린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제 자해를 하게 된 거거든요. 정말로 제가 느끼는 것은 정말 이 세월호 사건은 유가족뿐만이 아니라, 미수습자 가족들 그리고 생존자들을 위해서도요. 진상규명은 확실하게 되야 된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처벌받을 사람은 확실하게 처벌을 받아야만 이 상처들이 아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홍은전 : 이 사진은 청문회 때 유가족분들의 사진입니다. / 다음 질문으로요. 인양에 대해서 좀 여쭤보도록 할게요. 제가 이 사진을 보고. 저도 며칠 전에 세월호 관련해서 뭐 얘기할 자리가 있어서 급하게 막 정보들을 찾았거든요. 인터넷에서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사실일까?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이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이게 무슨 사진이냐면. 인양을 유가족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어요, 인양 과정을. 이 세월호라고 하면. 세월호는 배. 이 세월호라는 배는 정말 참사의 마지막 남은 증거 덩어리잖아요. 근데 그것이 지금 배가 가라앉아 있는데. 이것을 인양하는 과정을 정부가 유가족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는 거죠. 훼손이 되고 있는지. 인양은 하고 있는지. 뭐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으니까 유가족 분들이, 그 사고해역이 가장 가까이서 보이는 동거차도라는 섬에 이렇게 움막을 치고, 망원경을 갖다놓고 돌아가면서 여기서 이렇게 보고 감시하고 계신대요. 이걸 보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너무너무 끔찍하다,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요기 이 움막이구요. 여기서 아버님들이 돌아가시면서 지키고 계시고. 저기 보이는 게 사고해역이라고 해요. 너무 가깝죠? 예. 그 어마어마한 사고가 일어난 이 사고 현장이 너무 가까운 것도 되게 충격적이고. 예. 그렇습니다. 인양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어머님이 말씀을 좀 해주세요.

 

최순화 : 인양을 올 7월까지는 한다고 작년에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중국에 상하이 샐비지라는 업체를 선정을 해서 작업을, 그러니까 인양 준비 작업을 사실은 작년 11월까지만 한다고 했었어요. 그렇게 해수부가 발표를 했었어요. 근데 지금까지 겨울에는 뭐 물살도 안 좋고 날씨가 안 좋아서 작업을 못 한다 그랬거든요. 근데 그게 그 수색 종료가 된 게 언제냐면 2014년 11월 11일이에요. 그때 수색을 왜 종료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정부가 발표한 게, 너무 위험하다, 잠수사들이 위험하다, 날씨가 안 좋아서 점점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잠수사들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더 이상 들어가도 수색을 할 수가 없다 그러고, 수색 종료를 선언했거든요. 11월 11일이었어요. 근데 지금이 11월, 12월, 1월까지 지금까지 같은 바다, 같은 조건인데도 지금도 하고 있거든요. 그거는 그냥 핑계였다는 거죠. 그 인양, 그 수색 종료를 선언했을 때 유가족이 다 동의해서 그런 거 아니고. 실제적으로 뉴스에 나올 때는 다 동의한 걸로 나왔지만 거기 정부 편에 서서 그렇게 유가족들을 몰아세운 거죠. 너무 위험하다, 사람들이 더 죽는다 계속 몰아세우고. 그럼에도 그 미수습자 가족들은 계속 수색하기를 바랬어요. 자기 자식이 있는데, 배 안에 있는데 수색하기를 바라죠. 근데 아무튼 그 정부 측 사람에 의해서 그게 무슨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것처럼 수색 종료 기자회견을 해버린 거예요. 미수습자 가족들의 마음은 절대로 그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간에 그들 뜻대로 정부 뜻대로 수색이 종료가 됐고. 다음엔 바로 인양인 거잖아요. 인양을 할 거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굳게 믿고 거기에 계속 자기 아이들을 찾아주기를 원했지만 수색 종료 하는데. 아무튼 기자회견에 참석을 했거든요. 근데 인양이 그때 바로 안 됐죠. 인양 소식이 없었고 오히려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게 뭐 거기 세월호 주변을 무슨 해상공원으로 하자, 시멘트로 막아버려서 무슨 거기를 인양하지 말고, 사람도 그대로 놓고. 그대로 시멘트로 막아서 해상공원으로 하자는 새누리당 의원의 말도 있었고. 인양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인양하자는 게 아니라 하지말자는 얘기가 새누리당 의원을 중심으로 나오는 상태에서. 이제 저희 가족이 1월26일이었던 거 같아요. 1월29일인가? 19박 20일 팽목항까지 인양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19박 20일을 걸었거든요. 그 뒤로 이제 이게 알려지면서 인양을 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고. 구체적으로 이제 4월, 1주기 때 대통령이 발표한 거죠. 인양하겠다고. 그래서 이제 7월까지 인양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러면서 11월까지만 작업을 하고 겨울 동안은 쉬었다가 봄부터 시작해서 7월 달까지 인양 마무리 하겠다 그랬는데. 작업을 계속 하기 때문에 그것도 저희한테, 가족들한테 밝히지도 않고. 무슨 작업을 하는지 밝히지도 않고. 우리가 언어가 통하지도 않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가서 말을 걸어도 그 해역 가까이에 접근하지도 못하게 하고, 접근해도 말도 안 통하고.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섬인 동거차도에 들어가서 둥지를 틀었고. 가을. 가을부터였던 거 같아요. 9월인가? 8월? 암튼 가을로 알고 있는데. 가을부터 아버님들이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하다가 지금 동거차도에 계신 분들은 어머니 세 분이세요. 지난주에 어마어마하게 추웠잖아요. 그 추위를 그냥 저 천막에서... 어 진짜. 맨몸으로 다 견뎌내고 계세요. 저도 안 가봐서 상상을 못하는데 보내준 영상을 보면 진짜 바람소리만 들어도 너무 무섭더라구요. 제가 영상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감시하는 눈이 있다, 니네 무슨 짓 하는지 우리가 볼 거야. 이런 신호만 줘도 조금이라도 두 개 잘라낼 거 한 개 잘라내고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실제로 무슨 압박이 되긴 되는 것 같아요. 정부가 저희 가족들 상대로 설명회도 하고. 실제로 데크를 잘라내고 프로펠러를 잘라내고, 잘라낸 부분들이 있더라구요. 근데 그게 굉장히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데 저희 가족들... 물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잘라내서 어디로 가져가 버리고 이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어요. 이 중국 상하이 샐비지 업체가 쉬면 저희 가족들도 쉴 건데 계속 작업을 하니까 저희도 이 추운 날에 와서 감시하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별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니네 뭐하는지 우리 지켜볼 거야, 이런 의지 정도는 항상 보여준다는 그런 마음으로. 예. 지금도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홍은전 : 예. 그 세월호 인양이 증거로서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유가족분들이 늘 말씀하시는 것은 그곳에 아직도 미수습자 9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먼저다, 이런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 그 다음 질문으로요. 최근에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류품. 유품이라고도 하고 유류품이라고도 하던데. 주인을 잃은, 세월호에서 나온, 물건들이에요. 여행을 가던 친구들이었으니까 캐리어가 아주 많이 있고. 이것이 그동안은 진도군에 보관이 되어 있었다고 해요. 주인 찾아가라고. 근데 이제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물건들을 안산 분향소로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646일 만에 여행가방, 교복, 과자, 핸드폰. 이런 아이들의 물건이, 아이들의 물건만 돌아왔습니다. 예. 다음 사진도 보여주실래요. 예. 요런 물건들. 예. 이 물건들을 또 열어 보시면서 어머님들이 다시 한 번 또 마음이 많이 무너지셨을 거 같아요. 예. 최근에 있었던 일이구요. 이날 어머님도 계셨나요? 그 얘기를 좀 부탁드릴께요.

 

최순화 : 예. 지난 주 목요일이었어요. 아침 새벽부터 사람들을 모집해서 (?)정도해서 가지러 간 거지요. 이거를 다 진도군청으로. 이게 먼저는 사진 찍는 작업을 한 일주일 전, 열흘 전에 가서 하고. 그 다음에 21일인가, 그날이 목요일이. ....무진동 차량을 빌려서 아침부터 일찍 가서 분향소에 도착한 게 6시까지 오기로 했는데 6시 넘어서 6시 10분 15분경에 도착을 했어요. 캐리어는 딱 아이들하고 같은 의미로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보는데, 캐리어가 있고, 저 옆에 아이들이 있을 건데, 있어야 되는데. 안 봤을 때는 저도 몰랐는데 딱 보니까 진짜 맞아 저렇게 돌아오는 건데, 돌아오는 건데. 650일이 다 되어서도 돌아왔는데, 우리 아이들도 돌아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좀 예의를 표하기 위해서 캐리어는 분향소로 가서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거기서 헌화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 한 20개가 놓여졌어요. 근데 한 엄마가 거기서 아이 껄 찾았어요. 자기 아이 껄. 9반에 윤희라는 아이의 캐리어를 엄마가 그걸 분향소에 놓여 있는 데서 찾았어요. 항상 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데 사진으로 보니까. 사진으로 봤을 때하고는 또 달랐었는지. 어쨌거나 그래서 또 한 번 눈물바다가 됐었고. 이렇게 주인 잃은 캐리어들, 수많은 유품들이 이제 그냥 기념관에서 416기념관에서 전시용으로 전시되겠죠. 주인이 안 찾아가면. 이제 그런 전시용으로 전시가 될 텐데. 소중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죠. 그 안에 캐리어뿐만 아니라 아이들 신발 하나, 칫솔 하나 그런 것들 다. 만약에 저게 우리 아이 꺼였다면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품인 거거든요. 주인을 잃어버려서요. 주인이 찾지 않아서 그냥 전시실에 전시용으로 펼쳐진다는 게 정말 속상하고. 저희한테는 그렇게 마음 아픈 것들인데. 이게 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전시용으로 펼쳐져서 많은 사람들이 저걸 보면서 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하고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또 만족해야 되지 않는가. 예. 그런 생각이 듭니다.

 

홍은전 : 예. 뻘 속에 나와서 이게 씻어도 씻어도 냄새나 이런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데요. 저 사진의 제목이 ‘나를 찾아주세요’였거든요. 예.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 예. 그럼 이제 조미선 님께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광화문에 계시면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셨을 거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분, 사건. 이런 게 있는지. 또 광화문은 온갖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비방과 유언비어와 막 이런 것들이 쏟아졌던 곳이기도 해서, 그런 얘기도 괜찮구요. 광화문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조미선 : 광화문 이야기요. 세월호만 생각하고 광화문을 갔는데요. 광화문에 가보니까 세월호만 있는 게 아니더라구요. 세상의 모든 절망들이 다 거기에 있는 거예요. 거기서 뭐 쌍용자동차, 기륭전자. 그리고 저희가 서명을 받으면은... 그 앞에 한동안은 그 겨울에 어디였죠? 전광판에 올라가서 시위하시는 분도 계셨어요. 그래서 거기를 쳐다보면서 저희가 서명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광화문 광장에서요. 음. 세월호 참사가 유가족들한테 416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저한테도 똑같아요. 416 이전의 삶과 416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대한민국의 엄마들이 많이 그랬던 거 같아요. 학생들과 대한민국의 엄마들이 많이 그랬던 거 같아요. 저는 아무 것도 몰랐거든요. 어렸을 때 외국에서 많이 자랐구요. 그 다음에 결혼을 해서도 남편이 공기업에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뭐 비정규직이라든가 무슨 뭐 노동개악이라든가 이런 거 하나도 몰랐어요. 예. 그냥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데 광화문에 와보니까요. 이 나라가 얼마나 고장이 났는지 그게 다 보이더라구요. 그리고 또 제가 살다온 나라가 장애인들의 천국이라는 호주기 때문에, 정말 작년에 처음 여러분들을 봤어요. 광화문에서 열심히 투쟁을 하실 때 보니까 경찰들이 와서 들어서 다 옮겨버리더라구요.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광화문에서 그런 온갖 세상의 절망들을 다 보았구요. 그러면서 깨어나게 됐어요. 교회만 알고 살았는데. 교회도 보니까. 광화문에서 보니까 얼마나 한국교회가 고장 났고, 그 다음에 타락했고, 얼마나 정치적이고. 본인들은 세월호가 정치기 때문에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라고, 기도만 한다라고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너무나도 정치적이었어요. 뭐였죠. 국정화라든가. 그다음에 소녀상... 이런 것들은 또 다 찬성하는 그런 것도 내더라구요. 제가 속한 한기총, 뭐 다 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정말로 타락하고 정말로 정치적이고 정말로 기복적이구나 하는 것을 너무 많이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 이전의 삶으로, 그 이전의 신앙으로도 돌아갈 수가 없구요. 예. 정말 그랬어요. 저희가 서명을 많이 받고 있는데 지금 거의 2년 동안에 세월호 진상규명과 인양에 관한 서명을 자그만치 8백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어요. 저희가 천만인 서명이잖아요. 박근혜 씨도 천만인 서명을 받는다는데 얼마나 받을지 모르겠지만 거기야 기업체 통해서 받으면 그럴 수 있지만... 저희 같은 경우 얼마나 소중한 서명이냐 하면, 한 사람 한 사람한테 다 설명하고 그렇게 해서 받아낸 정말 서민들의 서명이에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전 세계 외국인들한테 받고 있고요. 전 세계 교민들이 받아서 또 저희한테 주세요. 그렇게 해서 모은 서명이 지금 800만명 정도 되는데, 그런데도 아직까지 꿈쩍을 안 해요. 그런데도 저희가, 우리 엄마들이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서명을 받는 건요. 그곳에서 만나는 특히 학생들 젊은이들 소위 말하는 세월호 세대라고 하는 이 아이들한테서 저희가 희망을 보기 때문이거든요. 저희 800만명 서명 중에서 제가 볼 때 7~80%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서명이에요. 저 했는데 또 해도 돼요? 라고 얘기하면서 또 하는 사람도 있고, 맨날 봤는데 또 하고 있고 이런 애들이 다 학생들인 거예요. 너무 가슴 아파하고 있고. 제가 기억나는 학생이 있어요. 작년 여름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같은 경우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아니고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도 와서 욕하고 지나가잖아요. 이제는 하도 오래 있다 보니까요. 멀리서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만 봐도 알아요. 저희한테 욕하고 지나갈 사람인지 칭찬할 사람인지 다 알아요. 신호등 저쪽에서 오면 눈을 딱 보고 제발 그냥 지나가라 그냥 지나가라 주문을 외워요. 아니나 다를까 와서 막 욕을 하고 가요. 그렇지. 이제는 다 알아요. 근데 정말 학생들이 오면 기분이 좋거든요. 근데 학생들 중에도 좋은 애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일베 라는 애들도 있어요. 서명할 때 조금만 딴짓 하면, 너무 많이 봤어요. 노무현 욕하고, 제발 그만해라 지긋지긋해. 딴짓 하다가 보면 주소란에 그렇게 써 있어요. 그러면 죽기 살기로 쫓아가서 걔를 잡아요. 그러면 농성장에 난리가 나요. 싸움이 나고.. 남자들은 난리가 나요. 나중엔 경찰들이 오고. 그래서 요즘엔 엄마들끼리 얘기해서 남자들은 안 끼어들이고 저희끼리 조용히 얘기해서 해결하는데... 작년 여름에도 어떤 한 남자아이가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거예요. 일베 같더라고요. 퉁명스럽게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이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이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피켓 든 남자를 보며 저 사람은 언제부터 저렇게 피켓을 들고 있었어요? 그러는 거죠. 그래서 제가 속으로 너 일베구나 생각이 들어서 퉁명스럽게 뭐 밝혀진 게 있어야 끝내지. 우리 평생 이거 할 거야. 그랬더니 그 남자애가 저한테 다가오더니 제 손을 딱 잡는 거예요. 제가요, 너무 고마워서 그래요. 너무 놀랬어요. 일베인 줄 알았는데. 그러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저 안산 살고 있어요. 고 3이에요. 희생된 애들하고 동갑이에요. 곧 입시가 다가오고 해서 아무것도 힘도 없고 할 수가 없어서 엄마는 공부만 하라고 하고 그래서 집에서 공부만 하고 있는데 공부가 안 돼요. 마음은 답답하고요. 그래서 전철 타고 무조건 와봤어요. 와봤는데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 아직도 이 많은 사람이 서명을 받고 있고 피켓을 들고 있고 추모를 하고 있는 걸 봤을 때 제가 너무 고마웠어요.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너무 이게 감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괜찮아 괜찮아 너희는 공부만 해. 아줌마들이 이런 거 다 할 수 있어 그랬더니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정말 잊혀지면 안 되는데 우리는 힘은 없는데 잊혀지면 안 되는데, 우리가 커서 힘이 생길 때까지 이 아이들이 잊혀지지 않도록 잘 좀 이어지게만 해주세요. 고등학교 3학년 되는 아이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희 거기서 다 울었어요. 아이하고 같이 끌어안고 울면서. 그래 괜찮아 우리 엄마들이 그렇게 해줄게. 어른들이 그렇게 해줄게. 너희는 공부만 해. 너 정치외교학과 가라. 그랬더니 안 그래도 그럴려구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래 정치외교학과 가서 정치인 돼서 다 때려엎어 그랬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갔거든요. 정말 그날 아 희망이 있구나, 저 아이들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들, 엄마들끼리도 우리가 이 아이들이 클 때까지 힘이 생길 때까지 이어주자, 마중물이 되어주고 몇 십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있어주자 하는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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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 마지막 질문입니다. 며칠 전에 창현이 어머니가 인터뷰해서 책이 된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상을 받았어요. 그때 창현 어머니께서 수상 소감을 얘기하실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416참사 후에 부모님들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 또한 기록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사 후에 저희도 시민사회 집회 같은데 가보면 구호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는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게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만, 부정부패, 탐욕, 무책임 생명 보다 이윤을 먼저 계산하는 풍토가 만연한 한국사회를 그 이전으로 돌릴 수 없다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인데요, 저도 그 구호를 좋아했습니다. 창현어머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어머님이 일기에 쓰신 게 기사화된 적이 있는데요. 가장 슬픈 게 뭐냐고 누가 물어봤대요. 어머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다시는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나는 가장 슬프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요. 저는 그 말이 되게 아프더라고요. 만약에 저라도 한국사회가 아무리 드러워도 못 참을 만해도 다시 가족을 살릴 수 있다면 저는 그런 사회로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을 것 같아요. 참사 후에 어머님의 삶이 가족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장 크게 변한 게 뭔지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듣도록 하겠습니다.

 

최순화 : 마음은 보여드릴 수가 없는데, 제일 많이 변한 건 마음이죠. 저도 똑같이 살았어요. 아이들 잘 키우는 게 최고의 목표였고, 그거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그냥, 맞벌이를 해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는 게, 서민으로서 안 되는 현실이잖아요.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저도 아이를 기르면서 그게 쭉 굳어지더라고요. 노후는 어떻게 될지, 노후 대책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피하고 그냥 아이들 잘 키우는 게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었어요. 저는 이 땅에 와서 그냥 ... 평범하게 사람으로서 잘 사는 것 그 정도 꿈이었는데, 그게 제 꿈의 전부였는데 그게 없어진 거잖아요. 둘 중의 하나가 없어졌는데, 다 없어진 거더라고요. 그니까 가족 4명 중에 한 명이 사라졌는데 가정이 다 파괴되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냥 병으로 죽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일 텐데, 전혀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어느날 갑자기 하루에 벌어지고 나니까. 그리고 그게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의문투성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혹은 더 불어나고 이런 상황에서, 가정이 겉으로 보기엔 외연적으로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저희 가족뿐만 아니라 다 그렇더라고요. 다 가정이 파괴된 거죠. 모든 사람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난 거예요. 생존자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살아남은 생존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그 아이들이 살아갈 날이 더 길잖아요. 이번에 12일에 졸업한 그 아이들이 정말 걱정이 돼요. 그니까 자기들 친구를, 친구 250명을 한 번에 잃고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거를 안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저희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에요. 이 상황에서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한 목소리로 내는 것은 그냥 진실 규명인데 그거밖에 없는 거죠, 할 수 있는 게. 꿈이 다 없어지고, 내 가족의 꿈이 산산조각 난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게 뭘 갖다준들 그게 좋겠어요, 좋은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그러면서 또 보인 거는 주변에 있는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건 그건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저희가 감았던 눈이, 감겼던 눈이 떠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굉장히 다른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약자들을 위해서 또는 정의를 위해서 온 삶을 바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또 너무나도 약한 사람도, 억울한 사람도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분처럼 이렇게 약한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은... 이전에 바랬던 성공, 잘 사는 것 이런 게 아니죠. 그냥 우리처럼 힘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살아야 된다는 것,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된다는 것. 그리고 저도 신앙인인데,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마음이 약자들을 향해 있다는 걸 지식으로는 알았는데 온전히는 몰랐거든요. 근데 하나님의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향해 있더라고요. 온 마음이 온 시선이 약자들을 향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이제 안 거죠. 이제 안 거에 대해서 그나마 다행인 거고 감사한 일인데. 앞으로 저희 가족들의 앞으로의 삶도 그런 삶을 따라갈 것 같아요. 이전에 그냥 평범한 삶을 꿈꿨다면 조금 더 의로운 삶, 나은 삶, 약자들을 위한 삶에 시간도 들이고 마음도 들이고 또 몸도 그렇게 향할 것 같아요. 여러분들과 같은, 같은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홍은전 : 어머니 기운내시라고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제 질문은 여기까지고요. 노들야학 분들 중에, 네, 질문 하십시오.

 

김동림 : 4월 16일날 세월호 사건이 있어서 부모님들이 마음이 많이 아팠을 텐데요. 저희도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저희랑 같이 공부하던 학생을 저 세상에 보냈어요. 같이 공부하던 학생인데요. 나와서 결혼도 하고 싶고 친구들도 사귀고 싶고 했던 그런 학생이었는데요. 4월 17일날 하늘나라로 보냈는데요. 근데 제가 소문인지 해프닝인지 모르겠는데요. 세월호 사건 때 분향소가 차려지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분향소 찾아가서 뭐 ... 그 할머니한테 했다는 게 진짠지 거짓인지 좀 얘기 좀 해주세요.

 

홍은전 : 그때 조문 연출했다 했던 그 사건 말씀 하시는 거죠?

 

최순화 : 대통령이 분향소 방문했을 때, 어떤 할머니가 꽃을 들고 가는 걸 대통령이 안아줬다... 근데 그게 연출이라고. 준비된 배우 같은, 어버이연합의 한 아주머니하고 얼굴이 닮았다 그런 소문이 있었고. 유가족은 아니었고. 그게 연출이었다고 저는 알고 있어요. 대통령하고 짜고.

 

김동림 : 아니 그걸 왜 그렇게 하는 건지, 그게 이해가 안 가요.

 

홍은전 : 우리 교장선생님처럼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셔서, 미리... (웃음) 죄송합니다.

 

배승천 : 좋은 질문일지 모르겠는데 저희 야학에서는 인권교육을 하러 학교를 나가는데. 고등학교나 중학교로 나가서 학생, 교사들을 만나 인권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됐을 때, 학생들이 인권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고 생각나는 단어가 세월호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가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렵더라고요. 함께 화를 내자고 얘기해야 할지,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알자고 얘기를 해야 할지 그 친구들한테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책도 보고 이러면서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는데 그냥 속상하고 화를 내면 되는 건지 제 마음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더 의미 있는 마음이 될 수 있을까, 너무 이상한 질문이기는 한데..

 

최순화 : 도와주시고 싶은 거죠? 도와주시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만큼 하시면 되죠. 화 날 때 화내고. 하느님도 어마어마하게 화를 낸 적이 있어요. 성경에 보면 화도 내시고 천둥번개 칠 때 하느님이 화내신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천둥번개 우르르 말씀하시는 그런 장면이 있거든요, 성경에. 화 내는 거에 대해서 저는 화내도 된다고 봐요. 근데 화낼 대상이 정확해야죠. 내 옆에 소중한 가족에게 화내거나 옆에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거 말고, 정확하게.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나면, 그 사람을 뭐 해코지 하라는 건 아니고 어쨌거나 그 부분을 화나지 않게 할 수 있게끔 해야 되는 게... 어쨌든간에 정책을 그렇게 만들어가야 할 것 같고. 가까운 미래에 선거가 있는데,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주로 정부쪽 아닌가요? 정부쪽, 새누리당쪽? 4월 13일에 투표는 다들 하실 거잖아요. 자기 권리니까, 충분히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투표로 제일 가까운 시일 내에 화를 표출해주시고. 투표장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서라도... (웃음) 제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죠?

 

홍은전 : 괜찮습니다. 저희도 다 할 겁니다.

 

최순화 :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해주셔도 돼요.

 

홍은전 : 노란리본 달아주세요. 그리고 명학이형...

 

김명학 : 오늘 한다는 얘기를 듣고, 금요일날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을 봤어요. 거기에서 이창현 학생 얘기를, 어머님이 인터뷰헌 것을 읽었어요.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아까도 나온 방석 이야기하고, 또 이창현 아버님이 새누리당 김무성 씨한테 무릎 꿇는 모습을 읽으면서 제가 많이 속상하고 그랬습니다. 왜 이창현 학생 아버님이 무엇 때문에 그런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한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끝끝내 대통령이나 그 사람이나 냉정하게 외면했습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이 대한민국 권력자의 대표로서 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자는 그렇게 냉정합니다. 자기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했던 것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참 슬펐습니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은 어떻게 보면 형편없이 병들어가는 한 사회이고 국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 들이 분노하면서 하는데도, 권력자들은 두 귀, 두 눈 다 감아버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우리 서로 힘내서 열심히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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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 교장선생님 말씀 같네요. 여기 계신데. 교장샘은 지금 열심히 카톡을 하고 계시네요. 한 말씀 하시겠어요? 아 교장샘 우시네요. 네, 눈물이 나시나봐요. 조금 있다가 한 마디... 하실 거 같아요. 네, 또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시면 하셔도 됩니다. 네, 두 분 중에 더 하실 얘기 남은 게 있을까요? 네 없는 걸로. 제가 며칠 전에, 저도 세월호 때문에 어떤 자리에 나갔다가 누가 저한테 물어봤어요. 유가족들 만나서 인터뷰하고 기록하고 하면서 나에게 온 변화가 뭐냐고 저한테 물어봤어요. 저는 어떤 게 변화가 있냐면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인 것 같아요.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죠. 아직 자식을 가져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너무나 억울하고 어이없게 잃었을 때 도대체 난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이런 상상, 할 수 있잖아요, 많이 불안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유가족분들이 어떻게 싸우셨는지 저희도 옆에서 봤으니까 아 저렇게 싸우면 되는구나 저렇게 살면 되는구나 이런 걸 본 것 같아요. 네. 그래서 저도...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라는 책이, 노들야학에서 2년 전에 돌리고 해서 보셨을 텐데, 정말 보기가 힘든 책이에요. 저는 그 책을 일부 썼지만 다른 사람들꺼 보기도 힘들구요, 제가 쓴 걸 제가 다시 보기도 쉽지가 않아요. 지하철 타고 가실 때 절대로 보면 안 됩니다. 실연 당한 애 같아요. 눈물이 펑펑 나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안 되겠다 그러면서 다시 가방에 넣고 오고 그러지만. 그래도 그 책이 되게 힘이 있는 책이에요. 읽어보시면. 어떤 힘이 있냐면 그 책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버님들, 어머님들이 싸우는 힘이 다른 게 아니라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존재를 지키는 것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교장선생님이 이야기하실 수 있나요? 저희 교장선생님이세요.

 

박경석 :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잘 들었습니다. 들은 것이 들은 걸로 끝나지 않고 계속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할 거죠? 저희도 광화문 밑에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 투쟁을 천오백일 가까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내일 또 당도 건설할 거예요.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했당 이라고 해서... 정치적인 이런 관계나 권력자들이 항상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가 있고, 그리고 며칠 전에 나쁜나라 영화도 봤거든요. 그걸 보면서 부모님들이 겪어왔던 그 세월과 이것을 보니 많이 좀 그렇더라고요. 아무튼 .. 그랬어요. 그래서 아무튼 우리는 부양의무제도 폐지하고 장애등급제도 폐지할 거예요. 그리고 반드시 그럴 건데 그 믿음만큼 세월호도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투쟁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죠? 야학은 그렇게 생각하죠? 함께 끝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영애 : 힘내세요~

 

홍은전 : 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광화문 그곳에 계속 있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진실을 찾기 위한 그 차가운 거리에, 여전히 가열차게 버티고 계셔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노들야학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두 분 건강 잃지 마시고, 노들야학도 언제나 그 옆자리를 함께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경석 : 우리 야학 학생들이 이렇게 열심히 듣는 거 처음이에요.

 

홍은전 : 저도 처음 봤어요. 그리고 앞으로 또 못 보실 거예요.

 

 

*녹취 : 한혜선, 박정숙, 김민주, 김유미

*정리, 사진 : 김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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